생각의 깊이, 세상의 이치[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정신분석의 영역에서는 나이가 든 분석가들이 젊은 분석가들을 가르치고, 젊은 분석가들은 나이 든 세대의 학술적, 분석적 능력을 존중하고 배우려 합니다. 서양 문화에 뿌리를 두고 시작한 정신분석이 동양의 유교적 가치에 영향을 받아서 그리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론적, 임상적 경험이 축적되면서 분석의 지혜가 깊어지기 때문일 겁니다. 분석을 떠나 생각해도 판단력, 통찰력, 해석하고 대처하는 능력은 젊은 나이에 성취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정신분석의 본질은 세상을 사는 개인의 방식을 다루는 것이니, 분석가가 지닌 삶의 지혜가 분석에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지혜는 쉽게 얻어지지 않으며, 시간의 단련과 검증을 받으면서 ‘늙은 나무’로 자라는 겁니다. 설령 늙은 나무에는 어린나무에서 느껴지는 싱그러움이 없다고 해도 주변에 그늘을 제공하는 묵직함은 어린나무가 할 수 있는 몫이 아닙니다. 그러니 분석가가 되는 수련 과정은 지식의 영역에 치우쳐 있어도, 분석가를 지도하는 교육분석가가 되려면 지혜의 영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물론 기억력과 연관된 지식의 영역은 나이가 들수록 줄어들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지혜가 지식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 제시한 지식 기반 답안을 최종적으로 지혜롭게 해석할 주체는 사람입니다. 지혜가 생기면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던 새로운 지식이 눈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세상이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거나 줄이고 순리를 따르려면 지식의 영역과 지혜의 영역이 적대적으로 간섭하지 않고 오히려 협업해야 합니다. 지식의 영역이 지혜의 영역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하면 세상은 시끄럽고 어수선해집니다. 지혜의 영역이 지식의 영역을 열등하게만 본다면 그 역시 잘못입니다. 지식은 지식의 길로, 지혜는 지혜의 길로 가면서 궁극적으로는 지식이 숙성되어 지혜가 되기를 소망하고 기대하며 사회 시스템으로 도와야 합니다.
태어나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철이 든다’고 합니다. 특정 분야의 지식을 높게 쌓는다고 해서 반드시 철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으로 쌓아 올린 전문성은 다른 관점에서는 다른 분야는 모른다는 고백일 뿐입니다. 그런 전문가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는 자신이 믿는 부분적 진실이 전체를 대변한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전문가라면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뛰어들어 헤집고 다니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국한된 지식의 틀에서만 보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없기에 그리하는 겁니다. 초보 분석가는 주로 지식의 영역에서 분석을 하려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가진 강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많은 분석가는 지혜의 영역에서 분석을 합니다. 지식보다는 지혜가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깊이가 얕을수록, 생각의 길이가 짧을수록 말실수하기 딱 좋습니다. 생각의 품질은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짧고 얕은 생각에서 말하면 깊은 생각이 아닌 입속의 침을 뱉은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듣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상처를 줍니다. 앞으로는 말을 조심한다고 입술을 깨물어도 근본 해법은 아닙니다. 소리는 입안에서 나오지만 말에 담긴 내용은 생각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깊이와 길이에 관심을 가져야만 변합니다.
남은 시간이 길고 짧은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문제가 아닙니다. 기대수명이 길어도 과거에 매여서 스스로 현재를 낭비하고 있다면 쓸 수 있는 미래가 줄어듭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 있다면 미래는 상대적으로 늘어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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