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넘보는 미일 동맹, 2차대전 이전부터 시작됐다
[황남순 평화통일시민행동 사무국장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2023평화통일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2023 평화통일시민강좌는 한반도 평화체제, 한미동맹, 북한의 건축과 경제 및 기후위기 대응, 전쟁국가 미국, 미일동맹의 역사를 3월 18일부터 11월 18일까지 신촌에서 진행됩니다. 아래는 지난 7월 15일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진행한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미국, "아시아에 중간기지가 필요하다!"
남북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남북의 역사학에 대해 서로가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를 만들었다. 북측의 역사 관련 자료를 살펴보
면 미국과 일본의 자료에 대한 분석을 상세히 해 놓았다. 미일동맹의 역사 또한 남북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설명하려 한다.
1784년 미국 상선이 청나라 광주에서 첫 무역을 시작했다. 첫해 순이익은 4만 불에 달했고 5년간 15척의 상선이 무역을 위해 광주를 꾸준히 드나들며 미국은 영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익을 올렸다.
19세기 초반, 미국은 유럽 수준의 산업자본주의 단계로 들어섰다. 1832년 미국은 인도양 연안 국가에 대한 (불평등)통상 조약 강요와 태평양 연안 국가들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해 '아시아 특별원정대'를 파견한다.
대(大)선주이자 국무성 특별사무관으로 아시아 특별원정대 책임자였던 에드몬트 로버트는 이때 미 국무성에 "일본과 통상교역의 길이 열린다면 장차 조선과도 교역할 수 있다"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매입한 사람으로 유명한 링컨 정부의 윌리엄 슈어드 국무장관은 동방과의 무역을 위해 "아시아 대륙에 식민지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조우했다"라고 했다. 비슷한 시기 러시아 주재 미공사 크레이는 "아시아에 육군과 해군이 튼튼히 의거할 수 있는 기지를 창설해야 한다. 지브로올터(Gibraltar, 지중해와 대서양을 이어주는 좁은 해협)와 같은 역할을 할 남해의 거문도를 우선 점령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거문도는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영국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점령했었다. 거문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러시아 함대가 중앙아시아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있다. 당시 영국 해군성 부상의 이름을 따 '해밀턴 항(Port Hamilton)'으로 불렸던 거문도에는 아직까지 영국군의 묘가 남아있다.
1845년 당시 미 상원 해군문제위원회 위원장은 "조선을 개항하려는 유럽 자본주의 나라들의 노력이 조선의 '쇄국 양이' 정책으로 실패하고 있는 상황으로 조선 개항을 위해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하원 본회의에 제출했다. 여기에서 '특별한 조치'란 함포를 앞세워 문호를 개방시키는 '포함외교'를 말하는 것이었다.
1848년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까지 진출한 미국은 마침내 태평양 연안 국가가 되었다. 그전까지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서는 인도양을 거쳤어야 했으므로 유럽국가들에 비해서 불리했다. 하지만 태평양 연안 국가가 되면서 태평양을 질러 중국에 바로 갈 수 있게 되면서 미국은 굉장히 유리한 조건을 획득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일본이나 조선의 부산을 중요한 중간 기착지로 여겼다. 1853년 사우스 아메리카(South America)호의 동래 용당포 침입, 1855년 투브라더(Two Brother)호의 통천 남파 사건도 일어났다. 조선 사람들은 이 배들을 '이양선'이라 불렀다.
미국의 조선 개항 시도 실패
일본 막부 해군사령관 가쓰 가이슈는 <개국기원>에서 '미국은 일본과 통상하는 길을 열고, 조선을 샌프란시스코와 상해 및 관동을 연결하는 안정적 석탄 보급지로 만드는 것을 궁극 목적으로 두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 동인도 함대가 일본 앞바다에 나타났고 그다음 해 일본을 개항시켰다. 페리는 1852년에 쓴 보고서에서 '거점기지'를 언급했는데 이는 단순히 식량창고를 지을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영토, 즉 정치 경제적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을 의미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의 대동강 침입은 단순한 상선의 항로 이탈이 아닌, 18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 침략 전략의 첫 시도였다. 국기도 달지 않은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약탈을 일삼았다. 평안감사 박규수와 분노한 조선인들이 포를 앞세운 제너럴셔먼호에 맞서 싸웠고 대동강 수위가 낮아져 오도 가도 못 하는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다.
그 후 미국은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야츄세트'호를 보내 조선의 해안선을 측량했다. 이때 만들어진 평양 만과 대동강 일대의 해도가 보스턴 공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미국은 1871년 5척의 근대함선을 이끌고 강화로도 들어왔다. 우리는 이를 '신미양요'라 부르지만, 미국의 공식적 기록에는 '1871년 조-미 전쟁'으로 남아있다. 신미양요로도 조선의 개항에 실패한 미국은 일본과의 결탁을 모색한다.
군국주의를 선택한 일본
봉건적 모순과 억압이 쌓여있던 상태에서 일본은 페리 제독의 침략으로 졸지에 자본주의 강국들과 억지 통상을 맺어야 했다. 서양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농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사회적 갈등도 증폭되었다.
일본과 구미 열강의 불평등 조약 이후 10년 동안, 미국의 대일 수출액은 59배, 수입액은 13.7배로 늘어났으니 일본에 대한 열강들의 수탈이 얼마나 막대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서양 열강은 자본주의 발전을 통해 제국주의로 바뀌었지만, 정상적인 자본주의 진입이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일본은 군국주의 체제를 통한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때 일본은 자기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미국과의 공모를 도모한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했다. 표면적 목표는 미일 불평등 조약의 개정과 근대화를 살펴보기 위한 시찰단이었지만 실제로는 신미양요 이후 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이와쿠라 대표는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일본이 미국의 조선과 아시아에 대한 문호개방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면, 일본과 맺은 조약개정에 응하겠다'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1873년 일본 해군성이 만들어질 때 일본 해군의 군함은 철함 2척을 포함하여 17척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 목조함정이었다. 이러한 일본에 미국은 3척의 군함과 8천 만발의 탄약을 넘겨주었다.
1875년,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운요호를 앞세워 강화도에 들어왔다. 함포를 앞세운 일본에 조선은 굴복하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조약을 통하여 부산항과 그 외 2개 항구 개항,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거주권, 자유 무역권, 조선 연해 측량권, 해도 작성권, 치외법권을 보장받았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근대화를 이루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 조선에서의 쌀이 일본으로 수탈되면서 조선의 쌀값이 폭등하고 일본으로부터 품질 낮은 면화가 들어오면서 조선의 면화 산업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조선의 근대화는 반봉건과 반외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홍장과 슈펠트의 협상으로 체결된 '조미조약'
강화도 조약에 대한 반대여론과 청나라가 서양 침략으로부터 누더기가 되는 것을 보면서 조선은 더욱 서양과의 문호개방에 더욱 부정적이었다. 일본을 통해 조선과 조약을 맺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1880년 해군 제독‧외교관이었던 로버트 슈펠트가 주일 청나라 영사 하여장을 만났다.
슈펠트는 러시아가 조선과 청나라 침략을 위해 해군을 동부에 집결시킨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청나라는 해군을 강화하고 조선은 서양과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 침략을 막기 위한 힘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의 이홍장은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오키나와까지 병합하자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또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과 미국 사이의 통상교류를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이홍장에게 조미 교섭의 주선을 일임하고 이홍장과 슈펠트의 협상으로 1882년 '조미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본격적 조선 침략과 미국의 지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경제가 엉망진창이 되고 나서 7년 후 임오군란(1882년)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상시주둔하게 되었다. 일본은 청나라 군인이 조선에 주둔하는 한 조선 침략을 이룰 수 없다고 보고 청나라에 맞선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1894년 육군병력을 13만 명으로 확장하고 청나라 북양함대에 맞서기 위한 '해군 확장 7개년 계획'도 추진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조선은 동학군을 진입하기 위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다. 이를 빌미로 일본군이 인천항을 통해 5천 명, 부산항을 통해 1만 명이 들어왔다.
갑오농민전쟁 발생 일 년 전, 교조신원운동으로 농민봉기가 확대될 것을 예상한 미국은 농민봉기에 맞서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청과 일본보다 먼저 인천항에 함대를 보내놨던 미국은 조선을 둘러싼 청일 각축전에 휘말리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일본을 앞세우기로 했다.
'전주 화의' 이후 조선 주둔 명분을 잃은 일본에 미국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이 주둔해야 한다며 일본을 지지해주고 일본이 청나라를 칠 시간과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일본은 청나라에 조선을 함께 개혁하자는 '내정개혁안'을 청에 제안했지만 조선에 대한 종주권이 있다고 생각한 청나라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겠다며 청나라 군대의 철군, 전신선‧철도 개설권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내정개혁' 강요 이전부터 국가적 부패와 폐정을 인정하고 내정개혁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농민군과의 '전주 화의'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폐정개혁 없이는 나라를 도저히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주적 개혁으로 조선내정에 대한 일본의 간섭을 막아보려고 했던 것도 있었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내정개혁안을 거절한다. 그 후 조선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을(1894.7) 실시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조선의 자체 개혁에 간섭할 여력이 없었다. 갑오개혁이 일본의 강요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해석이다.
조선이 일본의 개혁안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자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1894.6)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조선 병사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다음날 일본군은 대원군을 협박하여 새 정부를 구성하고 조선으로 하여금 '조청간 체결했던 3개의 무역 장정을 폐기하고 아산에 있는 청군을 철군시켜 줄 것을 일본에 의뢰했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정식 통고하게 했다. 그리고 일본은 청나라 함선을 공격하여 청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력만으로는 이홍장의 북향함대를 이길 수 없었다. 미국은 1894년 10월 1만 톤급 군함 6척 등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해 주며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일본은 평양성 전투를 계기로 청나라 군대를 압록강 이북으로 완전히 몰아내고 연이어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침입했다.
고종은 미국에 조선 문제에 대한 열강회의를 소집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절했고 청나라가 조선을 포기하도록 독촉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했지만 시모노세키 조약(1895.4) 체결 6일 후 요동반도에 이해가 걸려있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요동반도의 반환을 요구했고(삼국간섭) 일본은 청으로부터 추가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했다.
러일전쟁. '0'차 세계대전
1900년 6월, 유럽 열강이 차례로 청나라로 진출한 가운데 산동성에서 발생한 '의화단 난'이 북경으로까지 확산 되었다. 이를 빌미로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며 일본을 비롯한 8개국(영국,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미국,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일본)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청을 공격했다.
1896년 러시아는 요동반도에 대한 삼국간섭의 대가로 만주의 남북과 동서를 연결하는 철도 부설권을 획득했다. 러시아는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철도가 피해를 보았다는 명분으로 의화단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철군하지 않고 만주지역에 머물렀다. 러시아 견제의 필요성을 느낀 미국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하고 영국은 영일동맹을 체결(1902)했다.
러일 전쟁(1904~1905)은 사실 일본을 내세운 영국과 미국,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러일 전쟁을 0차 세계대전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전쟁비용 17억 원 중 미국과 영국이 8억 원을 보장해 주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에 나섰다.
러일 전쟁이 끝나갈 즈음 도쿄에서 가쓰라-태프트 조약(1905.7)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조선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서로 상호확인해 주는 이 밀약이 조선 침략에 대한 미일 결탁의 시초라고 알고 있지만 기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미국 방문과 뒤이은 운요호 사건부터 미일의 결탁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잠깐의 와해 시기를 맞은 미일동맹
미일동맹은 잠깐의 와해 시기가 있었다. 러일 전쟁은 만주지역에 대한 이권을 노린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을 맺으며 종료하게 되는데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겠다고 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했고 그러자 러시아와 중재자 미국에 대한 일본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미국은 자국의 도움으로 일본이 만주지역에 진출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남만주철도에 대한 공동경영을 1억 엔의 재정지원과 함께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의 이권을 미국에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이를 거절했다. 이때부터 미국과 일본의 갈등이 생겨났다.
1912년 신해혁명 이후 세워진 중화민국은 미국과 가까운 사이가 된다. 1922년 미국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중화민국을 불러 군비제한에 대해 논의하고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미국은 이때 체결한 군축조약으로 영일동맹 파기와 중화민국에 대한 일본 진출 억제를 이끌어 냈다.
미국은 장작림 정권과 함께 만주철도에 대항하는 철도건설을 추진하고 일본의 만주철도-대련 항에 대항하여 대련과 발해만을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 호로도에 무역항을 건설하는 계획을 추진한다. 더불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중화민국은 대일저항을 강화해 갔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거침없는 중국 침략이 계속되자 미국은 1939년 미일통상항해조약을 파기하며 일본에 석유, 철 등의 수출을 금지했다.
프랑스가 독일에 패하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반도(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일본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1940년 북부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독일,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1941년 남부 인도차이나 진출을 두고 미국과의 갈등이 더욱 선명해졌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으로의 중요한 수송로인 인도차이나반도의 일본 점령은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인도차이나반도의 완전 점령 전까지 미국의 해군력을 붙잡아두기 위해 진주만을 공격(1941.12)했다.
2차 세계대전 종결과 미국의 원폭실험 성공,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구축 결심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미국, 영국, 소련이 독일의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 포츠담에서 모였다. 독일의 전쟁배상 문제, 독일의 군사주의‧나치 제거, 독일의 식민지 처리 문제를 한 달 가까이 모여 논의했다.
이 와중에 소련을 제외하고 중국을 끼워 넣어 미국, 영국, 중국이 일본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 선언'(1945.7.26.)이 발표되었다. 중국의 장제스는 당시 회담에 참여하지 않았고 미국의 트루먼이 전신을 보내 '서명만' 했을 뿐이다. 포츠담 회담과 포츠담 선언은 별개였다.
포츠담 회담 하루 전날, 미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종전의 정책을 재검토하기에 이른다. 사실 동부 유럽에서 독일과 전쟁은 소련이 담당했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1943)로 전쟁의 승기를 잡았고 독일의 패전으로 기울어 가던 1944년에 미국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있었다.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이 모여 폴란드를 포함한 동부 유럽의 국경선 문제, 전후 독일의 처리, 유엔 구성 및 표결권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 구축 과정에서 중요한 의제들이 논의되었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이 종료(1945.5)된 후 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약속했다.
얄타회담 이후 루스벨트가 사망하고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어 포츠담 회담에 참가하게 된다. 세계대전 이후를 구상하는 미국에게 이제 새로운 고민은 '소련'이었다. 루스벨트는 소련을 끌어들여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지만, 트루먼은 소련 없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소련의 대일전 참전(1945.8.9.)전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1945.8.6.)했다.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함과 소련에 대한 경고였다. 세계대전이 종결됨과 동시에 냉전이 시작되었다.
일본이 항복하고 나서 6년이나 지나서야 전후 일본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조약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9.3.)이 체결되었다. 중국은 이미 1949년 공산화가 되었고 소련도 사회주의 국가로 승승장구할 때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과 48개 '연합국' 간에 맺어진 다자간 조약이며 같은 날 미국과 일본 간에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미국과 일본은 동맹관계가 되고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전략에서 일본이 주요한 거점이 된다.
일본은 최대 전범국 지위에서 벗어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최대 동맹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전쟁 범죄자 대다수가 면죄부를 받고 일본 재건의 주역이 되었다. 우리는 이를 '샌프란시스코 체제'라 부르며 전후 수십 년 동안 동아시아를 규정하는 국제 관계의 틀이 되었다.
[황남순 평화통일시민행동 사무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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