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 잼버리와 K팝에 대한 단상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폭우와 불볕더위에 이은 태풍, 그리고 준비 불충분으로 파행되고 있다는 뉴스가 이곳에서도 떴다. 포르투갈의 유서 깊은 항구도시 포르투의 남쪽에 있는 부샤키누 수목공원에서 18세에서 25세의 청년 스카우트, 이른바 ‘로버스 스카우트’의 17차 세계대회가 열리기 때문에 이곳 언론도 관심을 두고 보도했다. 또 리스본에서 열렸던 가톨릭 ‘세계청년대회’의 마지막 날 폐회 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7년에 열릴 다음 대회의 개최지를 서울이라고 발표해 이래저래 관심도 증폭됐다.
스카우트 하면 우리는 먼저 영국의 퇴역 장군이자 작가였던 로버트 바덴-포웰(1857~1941)이 1907년에 시작한 스카우트 운동을 떠올린다. ‘행동을 통해서 배운다’는 좌우명을 내세운 이 운동의 핵심을 그는 행복에 도달하는 진정한 길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있으며 자기 앞에 있는 세계보다는 조금 더 나은 세계를 남기는 노력이라고 지적했다. 책임과 참여를 강조하는 협동생활, 놀이를 통해 신체를 단련시키며 공작과 일을 배우고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단위의 야영생활이 그래서 특별히 강조됐다.
이런 스카우트 운동과 연결되었지만, 영국과 사회·문화적인 조건이 다른 독일은 이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1896년에 시작되어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사실상 중단되었던 ‘반더포겔’ 운동은 독일의 산업화와 권위주의가 낳은 자연과 인간의 소외에 대한 비판과 함께 소박한 삶이 주는 낭만과 건강한 삶을 추구했던 운동이었다. 먼 곳으로 유유히 날아가는 학(鶴)을 상징으로 삼았던 이 운동의 산실은 베를린의 ‘스테글리츠 김나지움’이었다.
큰아들도 이 학교 재학 때 ‘파드핀더(스카우트)’의 성원이었는데 야영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내놓은 먼지와 땀, 모닥불 연기로 찌든 단원복의 퀴퀴한 냄새로 온 집안이 난리였다.
이 운동의 초창기 지도자들은 특히 니체의 문명 비판적인 생철학(生哲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교회가 이미 신을 죽였다고 질타해서 기성 교회로부터, 또 교사들을 먼저 교육해야만 된다고 주장했던 니체였기에 청년들을 유혹하고 타락시켰다고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는 오히려 타락한 현실을 극복하는 길을 밝혀준 삶의 선생이었다.
스카우트, 초기엔 니체 영향 받아
그러나 이런 청소년 운동도 1933년 나치 집권으로 대부분이 ‘히틀러 유겐트’로 강제 통합되었다. 청소년 운동을 독일 유학 중에 지켜보았고 후에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었던 안호상은 1949년 2월 이를 벤치마킹한 ‘학도호국단’의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또 1968년 12월에 공표된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에도 동료 철학자 박종홍과 함께 참여했다.
정치·종교로부터 중립을 지키고 인종의 장벽도 넘어서는 이상으로부터 출발한 청소년 운동이었지만 그늘진 구석도 많았다. 영국 식민지 남아프리카를 통치하는 기병대를 지휘했던 바덴-포웰이 아프리카인에 대한 경멸적인 언사는 물론, 짐바브웨에서 아프리카 원주민 포로의 불법적인 처형 등을 자행했고 히틀러·무솔리니·프랑코·사라자르 같은 독재자들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강한 비판도 일었다. 그래서 몇년 전부터 그의 이름을 담은 거리를 다른 이름으로 바꾸거나 기념 조형물도 철거해야 한다는 청원운동이 영국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에서 일어났다.
청소년 운동이 기성정치의 틀에 묶여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은 국가가 통제하는 영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스카우트와 같은 자발적인 청소년 조직과 운동에서도 양상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가령 세계스카우트잼버리를 해당 국가의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재정과 행정 등을 비롯한 다양한 지원을 한다.
이번 파행된 대회의 참가자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K팝 콘서트와 K팝의 원조 ‘방탄소년단(BTS)’의 구성원들의 사진 카드 등이 참가자들에게 선물로 전달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국가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새만금 잼버리의 파행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정작 주인공인 청소년의 목소리는 전달되지 않고 관광을 즐긴다는 기사만 보인다.
한국의 대표적인 글로벌 문화 상품인 K팝이 대외적인 이미지 실추를 막기 위해 전격적으로 투입될 수 있어 이번 잼버리가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자위와 자찬의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K팝의 탄생 뒤에 숨어 있는 어두운 이야기를 세계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2019년 10월, K팝의 아이돌이었던 설리와 구하라가 며칠 사이로 극단적 선택을 했던 사건을 계기로 유럽의 많은 언론매체는 성폭력과 악성 댓글에 시달리는 이들 세계의 현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몇년 전 처음으로 방탄소년단에 관한 이야기를 독일 언론에서 접했을 때 왜 ‘방탄’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 나도 궁금했다. 총알을 막아내는 것처럼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난관을 이겨내는 젊음을 뜻한다는 한 유학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19세기 유럽의 어둡고 우울한 ‘세기말’의 정서와 결별하면서 ‘젊은이의 세기’라고까지 불렸던, 20세기의 문턱에 등장했던 반더포겔 운동을 그때도 떠올렸다. 그러나 당시에도 이런 대안적인 문화를 누릴 수 있었던 독일 젊은이들은 대체로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다.
K팝, 젊은층 꿈 담아 세계가 열광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서유럽의 젊은이들은 다시 굳어지는 냉전에 기댄 권위주의적이고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했던 ‘68혁명’의 불을 지폈다. 미국에서도 민권운동과 반전평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칠레·아르헨티나 등 남미에서도 저항운동이 있었지만, 집권세력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이때 존 바에즈의 ‘우리 승리하리라’, 밥 딜런의 ‘바람 속에 나부끼고 있네’와 ‘시대는 변하고 있다’나 존 레넌과 요코 오노의 ‘평화에 기회를 주라’와 같은 저항의 노래는 젊은이의 뜨거운 가슴을 채웠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반공과 경제개발이라는 명분 위에 섰던 독재체제가 적어도 87년 체제로 전환되기까지 실로 긴 세월에 걸쳐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싸웠다.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 투쟁 자체가 곧 이들이 지녔던 저항문화였다. 담담하지만 결연한 의지가 스며 있는 김민기의 ‘아침이슬’도 마찬가지로 이 투쟁과 함께했다.
이번 기회에 나도 방탄소년단이 불렀다는 노래의 가사를 한번 찾아보았다. ‘피 땀 눈물’에 니체 철학이 스며들어 있다는 기사가 눈에 특별히 띄었다. 그래서 가사를 꼼꼼히 읽어 보았으나 나의 니체 철학에 대한 지식으로 이를 찾아낼 수 없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들어 있는 독일어로 된 짧은 문구 하나가 뮤직비디오의 마지막에 달랑 등장한 것이 전부였다.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니체 철학과 관계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의 고민과 꿈을 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의 젊은이들이 K팝에 그렇게 열광할 수 있겠는가.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신조어 ‘MZ세대’에 해당되는 나이 폭이 사실 너무 넓다. 오히려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Z세대’가 K팝의 열성 팬들을 지칭하는 데 더 적합하게 보인다. 소셜미디어 세계에 사는 ‘디지털 원주민’인 이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추구하면서 정치적으로는 현실주의자들이다.
이들이 어떤 사회를 지금 추구하고 있는지를 두고 여러 나라에서 이들의 투표성향과 경제활동의 분석에 주안점을 두는, 많은 실증적인 연구들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번 대선에서 보여준, 과거와 다른 20대의 투표성향도 비슷한 과제를 우리에게도 이미 제기했다.
이번 새만금 잼버리의 표제는 ‘너의 꿈을 펼쳐라’였다. 그들의 꿈은 기성세대가 지녔던 꿈과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같은 꿈을 갖도록 강요해서도 안 되지만, 또 강요할 수도 없다. 꿈을 사고, 판다는 말이 있다. 서로 친화력이 있을 때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불가능하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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