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말뿐인 협치와 포용적 리더십
삼각형과 사각형은 유클리드기하학에서는 다른 도형이지만 위상기하학에서는 모두 단일 폐곡선으로 동형이다. 여당과 야당 모두 국민의 안전과 행복, 대한민국의 발전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한마음이지만 이를 구현하는 철학과 정책은 다르다. 정당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단일 폐곡선으로 같지만 정책이나 방법론에서는 서로 다른 다각형처럼 차별화된다.
정치의 출발은 서로 다르다는 것에 동의하는 데 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간극을 좁혀나가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치는 반대로 가고 있다. 진영정치와 팬덤정치가 더욱 심화되고, 거대 양당의 극한대립 속에 심리적 내전 상태에 이르게 됐다. 거리마다 걸린, 상대 당을 저격하는 원색적 문구의 현수막은 현재 정치지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정치권이 대립과 반목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의 길로 가야 한다는 말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클리셰로 들린다. 이와 대비돼 떠오르는 기억은 청와대 대변인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함께하며 접한 협치의 두 가지 단면이다.
2021년 10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한국은 독일과 정상회담을 했다. 회담장에 들어서니 앙겔라 메르켈 총리 옆에 차기 총리인 올라프 숄츠가 앉아 있었다. 숄츠는 2021년 9월 총리로 선출돼 12월 취임을 앞두고 있었다. 메르켈은 숄츠를 소개한 뒤 발언 기회를 주었고, 회담 중간에도 숄츠가 답하는 게 좋겠다며 발언권을 넘겼다. 후임자가 세계 정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뒷모습이었다.
메르켈은 중도 우파인 기독민주당(CDU) 소속이고 숄츠는 중도 좌파 사회민주당(SPD) 출신으로, 두 당은 이념상 양극단은 아닐지라도 노선은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도 메르켈과 숄츠는 정적이 아니라 협력 파트너로 보였다. 독일은 다양한 이념적 기반의 정당이 조화롭게 병존하는 다당제 국가로 연정 역사가 깊다. 현직 총리와 차기 총리가 나란히 앉은 장면은 독일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어떻게 정책 연속성이 보장되는지를 보여준다.
2021년 12월 호주를 국빈 방문한 문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인 노동당의 앤서니 앨버니지 대표를 접견했다. 호주를 방문하는 국빈은 야당 대표를 만나는 전통에 따라 마련된 일정이었다. 스콧 모리슨 당시 총리는 중도 우파인 자유당 출신이고 앨버니지 대표는 중도 좌파 노동당 소속이다. 자유당과 노동당은 당연히 정책노선에 차이가 있다. 자유당은 미국과의 외교를 중시하고 노동당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조한다. 문 전 대통령을 만난 앨버니지는 집권 여당을 비판할 수도 있는데 전혀 그런 언급은 없었다.
앨버니지는 “노동당은 기후변화를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고 있으며 탄소중립을 위한 신기술 개발과 수소·재생에너지 등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고 했다. 문 전 대통령은 “사회적 약자 편에 선 노동당이 호주의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회복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 대표 접견인지 총리와의 면담인지 헷갈릴 정도로 진지한 미래지향적 논의가 이뤄졌다.
앨버니지는 자기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책임 있는 발언으로 준비된 정치인이란 점을 보여주었다. 그는 2022년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이 이기면서 총리로 선출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 1년3개월이 됐는데도 야당 대표를 만나지 않고 있다. 2022년 3월 당선 인사에서 밝힌 “의회와 소통하고 야당과 협치하겠다”는 말이 무색하기만 하다. 여소야대 상황을 헤쳐가야 하는 윤석열 정부에 협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야당 대표를 만나지 않는 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비토를 넘어 그를 지지한 47.83%의 국민을 외면하는 일이다. 독일의 메르켈과 숄츠 총리, 호주의 모리슨과 앨버니지 총리는 삼각형과 사각형처럼 서로 다른 도형이면서도 단일 폐곡선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이런 협치와 포용적 리더십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박경미 전 청와대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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