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민족인 북한과 대결하려고 일본과 협력은 잘못”
“한-일의 관계 개선은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같은 민족인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협력한다는 것은 한국엔 사도(邪道, 그릇된 길)입니다. 협력이 의미가 있으려면 북한과 관계 개선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일본 내 대표적인 ‘지한파 지식인’인 와다 하루키(85) 도쿄대 명예교수의 번역서 두 권이 이달 잇따라 한국에 번역·소개됐다. 옛 소련의 기밀 자료를 활용해 한국전쟁의 시작과 끝을 종합적으로 재구성한 ‘한국전쟁 전사’(청아출판사)와 ‘패배’로 끝난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 과정을 되짚은 ‘북일 교섭 30년’(서해문집)이다. 러시아 연구자로 시작해 지난 40여년 동안 한반도를 제2의 연구 주제로 삼아 수많은 학문적·실천적 역할을 담당해 온 와다 명예교수를 지난 3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나 지금까지의 학문적 여정과 향후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가 한반도와 인연을 맺게 된 직접적 계기는 지난 8일로 50주년을 맞은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전까지 일본 시민사회는 한국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무관심’ 속에서 한국의 대선 후보였던 유력한 야당 정치인이 백주대낮 도쿄에서 납치되는 믿기 힘든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사회는 실로 큰 충격을 받았다.
와다 명예교수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비로소 눈을 뜨게 된 것은 김대중을 통해서”라고 말했다. 납치가 이뤄진 1973년 8월8일은 마침 일본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잡지 ‘세카이’ 9월호가 발매된 날이었다. 이 잡지에 야스에 료스케 편집장과 김대중의 대담 ‘한국 민주화의 길’이 실려 있었다. 그는 “일본인들은 이 잡지를 읽고 비로소 수난당한 한국인 정치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 시민사회는 이듬해인 1974년 4월 ‘일본의 대 한국정책을 바로잡고 한국 민주화 투쟁과 연대하는 일본 연락회의’를 결성한다. 와다 명예교수는 이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다.
한반도를 본격적인 연구 주제로 삼게 된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몇 년 간 활동을 하다 보니 한국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게 됐습니다. (주전공이 러시아이다 보니까)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몰랐습니다. 이를 깨달은 게 1979~1980년쯤입니다. 러시아 연구를 하는 사람이니까 처음엔 소련의 북한 점령기에 대해 논문을 쓰자고 생각했죠. 마침 이 무렵에 소련에서 점령군 관계자의 회상 자료 등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활용해 첫 논문을 썼습니다. 1981년입니다.”
논문을 낸 직후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명예교수의 기념비적인 대작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이 나왔다. “그 책을 읽고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료의 수준 차이가 너무 컸습니다. 커밍스 교수는 전쟁 때 미국이 노획한 북한 문서를 활용했습니다. 그런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본격적으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와다 명예교수의 한반도 연구는 김일성과 한국전쟁 등으로 확장돼 갔다.
일본 내 대표적인 지한파 지식인
‘한국전쟁 전사’ ‘북일 교섭 30년’ 내
‘디제이 납치’ 계기로 한국에 관심
전공 러시아사에서 한반도 연구로
‘북일국교정상화’ 등 실천적 활동도
“아베식 대결 노선 완전히 막혀…
절망의 끝에서 희망 봐야죠”
그와 동시에 북-일 국교정상화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등 실천적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첫 시작은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을 앞둔 1984년 7월에 낸 성명이었다. 일본 시민사회는 ‘일본이 식민 지배를 통해 조선 민족에게 큰 고통을 줬다는 사실을 반성하며 마음 깊이 사죄한다’는 내용을 담은 국회 결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국교가 없는 북한의 문을 두드려 보자고 한 것이죠.”
일본 사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시바시 마사시 사회당 위원장마저 이런 국회결의를 채택하는 것은 “꿈 같은 얘기”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1년 뒤인 1995년 8월 무라아먀 담화를 통해 일본 사회는 지난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혔고, 이는 1998년 10월 한-일 파트너십 선언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일본 시민사회의 성취는 딱 거기까지였다. 와다 명예교수는 ‘북일 교섭 30년’에서 전쟁 전 일본의 역사에 미련을 갖는 ‘보수 세력’과 지난 역사를 사죄·반성하려 했던 ‘진보 세력’이 일본의 진정한 과거사 청산을 의미하는 북-일 국교정상화라는 결정적 전선에서 맞붙었고, 진보 세력이 ‘패배’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승부의 변곡점은 2002년 9월 이뤄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평양방문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공식 사죄하며 ‘거대한 역풍’이 불었다. 현재 북-일 관계는 북이 납치해 간 일본인들은 전원 생존해 있으니 이들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납치 3원칙’이라는 제약 아래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남북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2019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멈춰선 뒤 한반도의 긴장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상황이다.
와다 명예교수는 한-일 관계를 풀어낸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에 대해선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북한과 관계 개선, 즉 평화를 위한 협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미·일이 18일 정상회담을 여는 등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니 세 나라가 연대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중심에 서서 북한 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풀어갈지 얘기를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고 군사력을 키우는 것은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북한과 외교를 해야 합니다. 한국이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노학자의 집필욕은 여전했다. 그는 “앞으로 북-일 관계에 대해 책을 두 권 더 쓸 생각”이라고 했다. “첫 책에선 어떻게 패배했나를 썼으니 두 번째 책에선 ‘아베 3원칙’을 끝내자고 주장하고, 세 번째 책에선 북-일이 국교를 정상화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 쓸 생각입니다. 현재 상황이 절망적이지만, 아베의 (대결) 노선 역시 완전히 막혀 있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절망의 바닥 끝에서 희망을 봐야 합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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