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칼럼] 야영지의 친절

한겨레 2023. 8. 15.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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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칼럼]정부는 새만금 야영지를 떠난 외국 대원들이 대한민국 여러 곳을 관광하도록 배려했다. 무리하게 공연이 잡히고 가수들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관광 명소와 대중음악 공연으로 잼버리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잼버리는 관광이 아니며, 잼버리에 참가한 스카우트 대원 역시 관광객이 아니다. 잼버리의 실패를 관광의 성공으로 대체하는 것은 얄팍한 눈속임이다.
다큐멘터리 ‘수라’. 스튜디오두마 제공

김탁환 | 소설가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끝났다. 연일 오르내린 국내외 뉴스를 통해, 새만금은 잼버리를 위한 야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로 낙인찍혔다. 주최 쪽의 준비 부족과 안이한 대응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실패의 이유에 대해선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성립하지 않지만, 냉방과 배수 시설을 충분히 하고 화장실을 청결하게 사용할 만큼 시스템을 갖췄다면, 잼버리는 성공했을까.

세계스카우트잼버리는 4년마다 열리는 스카우트의 가장 큰 야영 행사다. 오대양 육대주에서 모여든 또래 대원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다양한 야외 활동을 펼친다. 집과 학교를 떠났으니 익숙한 세계와의 결별이고,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으니 낯선 세계와의 만남이다. 이때 야영지는 만남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대부분의 야영지는 인간에게만 최적화된 도시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이 공생하거나 비인간 동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야영지에서 만나는 대상은 인간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산일 수도 있고 들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다. 풀일 수도 있고 나무일 수도 있으며, 곤충일 수도 있고 들짐승일 수도 있고 날짐승일 수도 있다. 학교나 집에서 책이나 영상으로 접했던 존재들과 대면하는 시간은 흥미로우면서도 불편하다.

잼버리는 실패를 배우는 축제이고, 안주하던 세계에서 한두걸음 더 나아갈 때 찾아드는 불안과 고통을 오롯이 감내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내가 아닌 존재의 곁으로 가되 거리를 둬야 한다.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기다린다고 원하는 바를 전부 이루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원하던 별이 구름에 가릴 수도 있고, 바라던 새가 날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험난한 과정에서 강조되는 것이 바로 스카우트 규율이다. 스카우트의 열두가지 규율 중에서 여섯째가 바로 ‘스카우트는 친절하다’이다. 스카우트의 친절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을 사랑하고 생물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된다.

새만금에서 대원들은 얼마나 친절할 수 있었을까. 가까이 가서 오랫동안 머문 해안 식물로는 무엇무엇이 있을까. 어떤 새의 알을 찾아 그렸을까. 언제 바닷가로 가서 작은 동물들의 발자국과 배설물 사진을 찍었을까.

잼버리에 참가한 대원들은 야영지를 돌아다니며 오감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를 위해서는 야영지의 자연 생태계가 인간의 개입 없이 원활하게 돌아가야 한다. 여기에 야영지 인근에 살면서,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고 지켜온 마을의 역사가 덧붙는다. 긴 세월 동안 만들어진 노래와 춤과 그림과 글이 문화를 이룬다.

새만금을 떠나며 대원들은 아쉬워했다. 지도에선 야영장 끝에 바다가 있다는데 아무리 걸어가도 닿을 수 없었다고. 바닷가를 날아다녀야 하는 물새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고. 대대로 내려오는 노래나 춤을 접하지 못했다고. 전통을 간직한 마을을 찾기조차 어려웠다고.

8월10일 오후 3시30분, 홍익대학교와 남서울대학교로 스위스와 스웨덴 스카우트 대원들 각각 100명 넘게 모였다. 다큐멘터리 ‘수라’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황윤 감독은 잼버리 참가자들에게 새만금 간척으로 사라져가는 갯벌의 아름다움을 알리려고, ‘극장으로 갯벌 가자’는 깃발과 함께 특별 상영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대원들이 야영지에서 체험하며 알고 싶었던 새만금의 역사와 생태와 문화가 ‘수라’에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추하지 않고 아름다우며, 더럽지 않고 깨끗하며, 홀로 힘겹지 않고 함께 즐거운 갯벌이 그곳에 있었다.

정부는 새만금 야영지를 떠난 외국 대원들이 대한민국 여러 곳을 관광하도록 배려했다. 무리하게 공연이 잡히고 가수들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관광 명소와 대중음악 공연으로 잼버리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잼버리는 관광이 아니며, 잼버리에 참가한 스카우트 대원 역시 관광객이 아니다. 잼버리의 실패를 관광의 성공으로 대체하는 것은 얄팍한 눈속임이다. 차라리 스카우트의 여섯째 규율을 돌아보며 곱씹는 편이 낫다.

새만금이야말로 내 생애 최악의 야영지였다면서 귀국길에 오른 스카우트 대원들에게, 뒤늦게나마 선물을 보냈으면 싶다. 다큐멘터리 ‘수라’를 함께 볼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흰발농게가 기어다니고 검은머리갈매기와 도요새가 나는 곳. 어부들이 경운기를 타고 갯벌로 가선 온종일 일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곳. 지구라는 행성에서 갯벌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국경을 초월하여 함께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스카우트 대원들이 규율로 지켜온 만인과 만물에 대한 친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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