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바깥길] 거대한 착각

한겨레 2023. 8. 15.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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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의 바깥길]이 모든 착각의 이면에는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멸시와 조롱이 깔려 있다. 노동하는 자는 게으르고, 속이고, 심지어 공짜만 찾는다는 관념. (…) 수십·수백억원 배임과 탈세에는 대범하게 관대하지만, 노동자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몇만원에는 불같이 분노한다. 가진 자가 속임에 능하다는 사실은 간편하게 무시하고, 없는 자는 늘 속인다고 믿는 비대칭적 착각 때문이다.
국민의힘 노동개혁특별위원회는 지난달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실업급여 제도개선 공청회를 열었다. 월 184만원 수준인 실업급여 하한액을 낮추거나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가운데)은 공청회 뒤 “실업급여 제도가 악용돼 달콤한 보너스라는 뜻으로 ‘시럽급여’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해 실업급여 수급자 폄훼 논란이 일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착각은 힘이 세고 질기다. 때로는 세계적 규모다. 1910년 영국인 노먼 에인절은 ‘거대한 착각’이라는 책을 냈다. 당시 전쟁 없던 시절이 제법 지속되면서 그는 이런 평화가 경제적 이유로 계속될 것이라 믿게 되었다. 국가 간의 경제적 교류가 급속히 늘어나는 상황에서 전쟁이 난다면 어느 국가에도 이득이 안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유럽에서 전쟁은 더는 일어나지 않고, 혹 발발해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책은 수십개 언어로 번역되고 날개 돋친 듯 수백만부가 팔렸다. 하지만, 불과 4년 뒤 유럽은 전쟁의 광기에 빨려들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병사는 1천만명이 넘었다. 결국 ‘거대한 착각’은 그 자체가 “거대한 착각”이었다. 사람들의 기억이 다시 흐릿해졌던 1930년대 초반 에인절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안 돼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착각은 은밀하고 치명적이다. 가령 경제와 금융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숫자와 통계를 신성시한다. 그런데 자신과 타인의 소득에 관한 통계는 예외다. 다시 영국의 경우다. 몇년 전 금융권 핵심인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이들의 소득수준은 상위 0.1%에 속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상위 10% 정도에 속한다고 믿었고, 심지어 중간 정도라고 답한 이도 있었다. 상위 10%의 소득수준을 묻는 말에 그들이 추정한 평균 액수는 실제 액수보다 무려 4배나 많았다. 빈곤소득 수준으로 추정한 액수는 평균소득과 비슷했다. 요컨대, 자신의 소득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하고 타인의 소득은 과대평가했다. 설문조사가 끝나고 정확한 통계 수치를 알려주자, 그들은 처음에는 머쓱해하다가 곧바로 자신들의 고소득은 노력과 능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항변했다. 이들이 누구인가. 임금이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경제에 흠집이 생긴다며 ‘비분강개’하는 사람들이다. 폴리 토인비의 ‘불공정한 보상’이라는 책에 나오는 씁쓸한 장면이다.

착각은 당당하고 편리하다. 한국으로 옮겨가 보자. 코로나바이러스 유행으로 고용 상황이 어려웠을 때 버팀목 노릇을 했던 실업급여가 갑자기 도마 위에 올랐다. 실업급여 때문에 일자리를 찾지 않는다는 해묵은 주장이 나오더니, 실업급여 받아 국외여행을 다니거나 “명품 선글라스와 옷을 사는 식으로 즐긴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온 ‘주제’에 싱글벙글 웃는다며 실업자의 ‘품성’까지 문제 삼았다. 당신 상황이 어려워서 우리가 귀한 돈을 주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식이다.

역대급 ‘착각’이다. 실업급여는 정치인들이 긍휼한 서민에게 내리는 ‘성은’이 아니다. 보험이다. 노동자들이 월급에서 따박따박 보험료를 내다가, 기업의 불가피한 사정으로 퇴직한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보상’이 실업급여다. 자동차보험 가입자가 사고로 폐차하면 받는 보험보상금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 보상금으로 무슨 차를 어떤 식으로 사는지는 천하의 권력자도 뭐라고 할 수 없듯이, 고용보험 가입자가 실업급여를 춤추면서 받으러 가든 선글라스를 사든 상관할 바 아니다. 제 돈 내고 제 몫 찾아가면서도 고용센터 문 앞에 서면 주눅 들기 쉬운 법이니, 당당하게 실업급여를 받는 것은 오히려 사회가 권장해야 할 일이다.

나랏돈도 들어가지 않느냐고 한다. 맞다. 지금 고용보험 기금은 적자 상태고, 재정적 지원이 불가피하다. 고용 사정이 예외적으로 복잡하고 어려우면 당연히 실업급여 지출이 많아지고 적자가 생긴다. 반대로 고용 상황이 좋아지면 기금이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고용보험의 일반적 특성이다. 그리고 고용 시장이 급변하는 만큼 고용보험도 계속 조정되어야 한다. 보험료율도 계속 살펴보고 조정하고 수급 체계의 효율성도 높여야 한다. 그게 정부의 역할이다. 정책이나 제도에 틈을 만들어놓고서는 그 틈에 들어온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전형적인 주객전도다.

여기에 특수한 사정도 있다. 코로나 기간 각종 사업성 기금이 재난지원금의 재원으로 활용되었다. 2021년 4차 재난지원금의 경우 약 1조7천억원이 이런 방식으로 동원되었는데, 그중 6500억원 이상이 고용보험기금에서 나왔다. 즉, 국가 재원을 조달해야 할 곳에 보험 적립금을 급하게 ‘변칙적으로’ 가져다 썼다. 이렇게 보면, 현재 고용보험의 적자는 ‘시럽급여’ 때문이 아니라 국회와 정부의 ‘반칙’ 탓이다. 평생 고용센터에 가본 적 없는 이들의 편리한 착각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착각의 이면에는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멸시와 조롱이 깔려 있다. 노동하는 자는 게으르고, 속이고, 심지어 공짜만 찾는다는 관념. 이를 굳이 멸시와 조롱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부유하고 힘 있는 자들의 게으름, 일탈, 불법에 대한 관대함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수십·수백억원 배임과 탈세에는 대범하게 관대하지만, 노동자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몇만원에는 불같이 분노한다. 가진 자가 속임에 능하다는 사실은 간편하게 무시하고, 없는 자는 늘 속인다고 믿는 비대칭적 착각 때문이다.

‘풀빵’이라는 단체가 있다. 전태일이 버스비를 아껴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준 데서 유래했다. 급전이 필요한 저소득 노동자를 위해 소액 대출을 해주는 노동공제연합이다. 이자는 낮고 담보는 없다. 만들어진 지 3년 정도 되었다. ‘풀빵’이 만들어졌을 때 경제 물정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돈 떼먹기’부터 걱정했다. 자산이나 현금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급하게 빌려가는 대출이니 원금 미회수 확률이 아주 높을 것이고, 기금은 금방 바닥을 보일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런데 그런 사고는 없었다. 생계비를 빌려간 대리운전기사, 사고가 나서 배상하고 치료한다고 빌려간 라이더, 모두 때맞춰 돈을 갚았다. 도덕적 해이라는 것은 실상 이쪽보다는 늘 착각하는 저쪽 세계의 문제다.

‘거대한 착각’의 결론은 착각이었지만, 출발점은 옳았다. “인간의 행동을 이끄는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의견이고, 이건 완전히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것을 토론을 통해서만 바로잡을 수 있다”는 믿음도 덧붙였다. 나는 이건 착각이 아니길 바란다. 에인절이 걱정했듯이, 이마저 안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만든 똥통에서 계속 맴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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