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처럼 빛의 화폭을 탐구해온 베트남 노장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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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특히 이미지를 드러내는 미술은 속이지 않는 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속이며 작업했을 때 나중에 굉장히 나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겁니다."
파리 뱅센느 숲의 골방과도 같은 작업실에서 평생 수행하듯 새어 들어오는 빛을 응시하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 추상그림을 창작해온 이는 흐엉 도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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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특히 이미지를 드러내는 미술은 속이지 않는 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속이며 작업했을 때 나중에 굉장히 나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겁니다.”
단색조 회화를 앞세운 한국 추상미술의 ‘허장성세’를 향한 고언처럼 들렸다. 올해로 78살이 된 베트남 출신의 노장 화가가 예언자처럼 던진 말 한마디가 뜨끔하게 와 닿았다. 그가 강조한 건 “진실되게 진실을 그리는 것”이다. 파리 뱅센느 숲의 골방과도 같은 작업실에서 평생 수행하듯 새어 들어오는 빛을 응시하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 추상그림을 창작해온 이는 흐엉 도딘이다. 경구와도 같은 작가의 한마디 한마디는 지난 70여년 홀로 빛과 추상의 세계를 탐험해온 그림 인생에서 녹아 나온 것들이었다.
1945년 베트남 메콩강 부근 마을에서 태어난 도딘은 1954년 식민통치를 재개하려는 프랑스군과 베트남 민중이 대결한 인도차이나 전쟁의 전화를 피해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 뒤 추상미술의 자유정신을 갈고 닦으며 깨달은 금쪽같은 회화적 이치가 전시장의 작품들 속에서 은은히 빛나고 있다. 지난달 7일부터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 서울점에서 시작한 그의 전시는 지금 국내 화단과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반향을 낳고 있다.
두개층 전시장에 나온 출품작들은 대개 흐릿하고 모호한 엷은 빛의 회색조나 누른빛 화면에 가늘거나 굵은 선 혹은 허연 자취가 휙 그이거나 지나가는 이미지를 띠고 있다. 1980~1990년대 한국 미술계를 풍미했던 아그네스 마틴 같은 서양 미니멀 그림 대가들이 얼추 비치지만, 작품들을 가까이 살펴보면 전혀 다른 성격의 화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돌을 갈아 만든 안료를 켜켜이 바르며 빚어낸 색면은 인공성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투명함과 깊이감이 엿보인다.
대상을 묘사하는 리얼리즘의 속박보다 자유로운 색과 형상의 탐구가 좋아 추상에 몰입했다는 작가가 필생의 탐구 대상으로 여겨온 것은 빛이다. 어두운 작업실에 은둔하며 수행하듯 창으로 비치는 빛의 속살을 화폭의 공백에 반영하는 작업을 거듭해온 도딘은 자신의 회화 핵심을 밀도와 투명도를 담은 빛의 구현이라고 요약했다. 실제로 출품작들은 전시장에 밴 은은한 광선과 어울려 볼 때마다 전혀 다른 미감과 분위기를 발산한다.
1980~1990년대부터 베트남 전통 옻칠 기술에서 착안해 안료를 층층이 점착시키는 방식을 축적해온 작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케이 에이(K.A.)’연작에서 투명한 색상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표시된 선이 우아하게 화면을 넘나드는 조형적 시도를 보여준다. 그림의 안과 밖, 관객과 작가의 시선 사이로 색과 선이 자유롭게 율동하는 세계를 연출한 것이다.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 여러 회화 장르를 폭넓게 공부한 도딘은 2020년까지 은둔하며 작업한 까닭에 작업들이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021년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 기메 아시아 박물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통해 처음 주목을 받은 이래 지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때 코레르 박물관 전시를 이어갔고, 올해 4~6월 14회 광주비엔날레에는 초청작가로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아들의 간곡한 권유로 결국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됐다는 도딘은 아시아권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라 더욱 기쁘고 설레는 마음이라고 털어놨다. 19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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