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명칼럼] 한국이 중국에 편승하리라는 빗나간 전망
한미일 밀착, 러-우戰 못 설명
한국 문명은 보편의 가치
그 힘을 75년전 이승만은 알아
새뮤얼 헌팅턴은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냉전 이후 국가와 이념을 대체해 국제 정치를 작동시킬 핵심 동력으로 문명을 지목했다. 1990년대 나온 정치학 이론 중 가장 중요한 것에 포함될 '문명 패러다임'은 서구, 중국, 이슬람 등 몇몇 문명권별로 중심국이 주변국을 규합해 세력화하고 다른 문명과 대립할 것이라 주장한다. 헌팅턴은 이 책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을 점친 동시대 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를 양국 간 문화적, 민족적, 역사적 고리를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러·우 전쟁에 관한 한 미어샤이머가 옳았다는 것을 이제 모든 세계인이 알게 되었다.
문명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관찰하는 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한국을 중화권에 포함하고 일본을 별도의 문명으로 분류한다. 아널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20세기까지 존재한 세계 문명을 21개로 들고 한국·일본 사회를 중국 사회와 따로 구분하는데 이는 토인비가 독특한 것이다. 헌팅턴은 냉전 이후 세계가 문명의 단층선에 따라 나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역시 한국을 중화 문명에 포함했다. 중국계는 아니지만 중국의 유교문화를 공유하는 나라로 베트남, 북한과 함께 한국을 든다. 그리고 중국이 부상할수록 이들 나라가 중국에 편승할 것이라 예상했다. 오늘날 미국의 아시아 전문가들 다수가 이 관점을 따르고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늘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국이 유교 혹은 한자문화권에 속한다는 이유로 중화권으로 분류한다면 그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문명이 국제 정치 세력의 주체가 되는, 가치공동체적 성격을 띠게 되는 헌팅턴의 세계에서 한국이 중화 문명의 일원으로 중국과 보조를 같이하게 된다는 관점은 한국인인 나의 직관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한반도가 스스로 중화의 일원이고자 했던 시기는 길게 잡아도 19세기까지다. 그 시절에도 중화를 수용하는 정도는 문화와 정치에서 편차가 컸다. 그것은 복잡한 얘기가 아니다. 지금 한국인이 미국과 중국에 느끼는 동질감, 호감도, 가치관의 일치 정도를 떠올려 보라. 어디가 더 동질적인가. 중국의 세력이 커질수록 비호감도 팽창하고 있다. 헌팅턴은 생활규범으로서 유교 문화권의 동질성을 절대 종교인 이슬람과 같은 범주로 엮어버렸다. 그것은 다른 차원의 신념 체계다.
헌팅턴은 미국이 확고부동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 한 일본조차 중국의 패권에 순응하고 결탁할 것이라 전망하면서 미국이 의지를 보일 가능성은 작다고 했다. 지금 미국은 중국 견제에 확고부동하며 한·미·일은 동북아의 나토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중국이 지배하는 세상을 오래 경험한 한일은 그때보다 지금이 낫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이익이 중국과의 결탁을 막고 있다.
어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948년 건국이 조선이나 고려의 건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문명 갈아타기'가 동시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대륙적 질서에서 호혜와 개방의 해양 문명 질서로 우리 스스로 걸어간 날이다. 이승만은 1904년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청나라 사람들이 서양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우리는 청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서양을 두려워했어야 했다"고 쓰고 있다. 이 구절이 나오는 장의 제목은 '우리는 여러 번 좋은 기회를 놓쳤다'이다. 이승만은 40여 년 후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 문명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헌팅턴은 한 나라가 속한 문명을 그들의 전통과 문화로만 판단했다. 그 전통과 문화가 이념보다 힘이 셀 것이란 가정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문명 패러다임으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과 지금의 한·미·일 밀착을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인은 75년 만에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라는 보편 문명의 가치를 체화했다. 굳이 문명을 말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문명이다. 그 점에서 헌팅턴은 틀리고 이승만은 옳았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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