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좋은데 맛도 좋네…'빵심' 사로잡은 가루쌀의 진격
전북 군산시 수송동에 있는 홍윤베이커리. 아담한 크기의 빵집이다. SNS에서는 이성당, 영국빵집과 함께 '군산 3대 빵집'으로 통한다. 이들 빵집 때문에 군산은 '빵지순례'의 필수 코스로 꼽힌다. 지난 주말 이곳을 찾은 것은 순전히 가루쌀 때문이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가루쌀로 빵을 만들어 팔고 있는 곳에서 가루쌀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빵집에 들어서자 다양한 가루쌀 빵이 보인다. 소보루빵, 단팥빵, 식빵, 크림치즈빵, 슈크림빵, 야채빵, 크로켓, 카스텔라, 각종 쿠키 등 일반 빵집에 있는 빵은 여기에도 없는 게 없다. 잠시 머무는 동안에도 손님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이 집의 최고 인기 제품인 짬뽕빵은 오후가 되자 동이 나 맛볼 수조차 없었다.
직접 맛본 가루쌀 빵은 일단 누가 말하지 않으면 밀가루로 만든 것인지, 쌀가루로 만든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밀가루 빵보다 식감이 부드럽고 쫄깃하게 느껴지는 것도 꽤 있었다. 어떤 빵은 유독 촉촉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가루쌀로 낸 가루가 밀가루보다 수분 함유량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쌀가루로 만든 빵이 밀가루 빵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듯도 싶었다.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가루쌀 빵
군산 최초의 제과기능장 타이틀을 달고 있는 홍동수 홍윤베이커리 대표는 농촌진흥청이 가루쌀 품종을 개발한 직후인 2016년부터 쌀빵을 만들고 있다. 17세이던 1984년 광주광역시에서 빵집 종업원으로 제과·제빵을 시작한 그는 1994년 지금의 빵집을 열었다. 남들처럼 수입 밀가루 빵을 만들던 그는 2000년대 들어 대기업 프랜차이즈로 골목 빵집이 어려움을 겪자 제품 차별화를 위해 우리 밀 빵을 시작으로 다른 길을 걸었다. 이후 흰찰쌀보리에 이어 일반 쌀빵을 만들다가 농진청에서 소개받은 가루쌀로 빵을 제조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농진청은 새로 개발한 가루쌀의 상용화를 위해 우리 농산물에 각별한 애정이 있는 홍 대표와 협력했다. 당시 농진청은 전국 6곳의 협력 빵집을 골랐지만 이곳을 제외한 나머지 5곳 빵집은 전부 중도 포기했다. 가루쌀을 이용해 제대로 된 빵을 만드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홍 대표는 "가루쌀을 구하기 위해 농가와 계약재배를 하기도 했고, 가루쌀 제분업체를 직접 발굴했어야 하는 등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지금의 가루쌀 빵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쌀로 빵을 만드는 건 사기라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는 "쌀빵을 만들던 초기에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직원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몇 시간 동안 빵집을 샅샅이 수색한 적이 있다"며 "누군가가 수입 밀가루를 사용하면서 쌀빵을 만든다고 한다며 신고한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두 달 뒤 다시 들이닥쳐 재조사할 정도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가루쌀로 만든 빵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게 홍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가루쌀이 일반 쌀과 가장 다른 점은 물에 불리지 않고 바로 빻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라며 "물에 불리는 과정이 필요한 습식제분은 건식제분에 비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 쌀로 습식제분을 해 빵을 만들면 식감이 꺼끌꺼끌하고 밀가루 빵에 비해 덜 부푸는 현상이 있지만, 가루쌀은 식감도 부드럽고 상대적으로 잘 부풀어 올라 빵을 만들기 좋다"고 덧붙였다.
가루쌀 품종 눈여겨본 농식품부 장관
이런 가루쌀을 적극적으로 보급해야겠다고 처음 생각한 사람은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첫 농축산식품비서관으로 들어간 정 장관은 3년6개월간 참모 생활을 마치고 2016년 8월 농진청장으로 부임했다. 그때 농진청에서 가루쌀 품종이 새로 개발된 것을 알게 됐다. 처음 보는 순간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한 그는 곧바로 특허 등록과 품종 보급을 지시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명맥만 유지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초대 농식품부 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가루쌀을 챙겼다. 대통령에 대한 첫 업무 보고 때부터 가루쌀은 핵심 현안으로 보고됐다. 가루쌀을 재배하면 우리 농업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우선 가루쌀은 밀을 대체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밀 자급률은 0.7%에 그친다. 연간 식용 밀 수입량이 250만t에 달한다. 한 해 쌀 생산량의 60%가 넘는 밀을 수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가루쌀은 일반 쌀과 달리 밀처럼 가루로 만들어 사용하기 쉽다는 게 최대 장점이다. 그 이유는 가루쌀의 전분 구조가 쌀보다 밀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정 장관은 "우리가 먹는 쌀은 전분 구조가 치밀하고 단단해 가루로 빻기 위해서는 물에 한참을 불려야 하는 반면, 가루쌀은 전분 구조가 밀처럼 둥글고 성긴 탓에 쌀알을 손으로 눌러 부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가루쌀을 일반 쌀과 밀의 중간 정도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분 구조만 보면 오히려 밀에 더 가깝기 때문에 제분하기 용이하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밀을 이용해 만드는 각종 식품류를 가루쌀로 제조하면 밀 수입을 줄여 국내 식량자급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루쌀을 잘 활용하면 쌀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가루쌀은 일반 쌀을 재배하는 논에서 그대로 재배가 가능하다. 기존 벼농사를 가루쌀 농사로 대체하면 그만큼 쌀 생산량이 줄어 고질적인 공급과잉 해결에 도움이 된다. 정부가 올해 들어 가루쌀 재배로 전환할 경우 ㏊당 100만원에 달하는 전략작물직불금을 농가에 지급하는 이유다. 가루쌀과 밀 등 동계작물을 이모작하면 직불금은 ㏊당 250만원으로 늘어난다.
정부가 굳이 가루쌀에 직불금을 지원하는 것은 지금까지 쌀 공급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사용해 온 예산이 그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작년 쌀 공급과잉과 쌀값 폭락으로 정부가 72만t을 시장격리하는 데 들어간 예산만 어림잡아 1조7000억원에 달한다. 이렇게 격리된 쌀은 3년 정도 보관한 다음 주정용이나 사료용으로 헐값에 팔리기 때문에 창고 보관료 등을 감안하면 사실상 투입 예산 전액을 허공에 날리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쓰는 것보다는 쌀 대신 다른 작물로 전환한 농가에 직불금을 지급해 쌀 과잉을 해소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가루쌀은 이모작에 유리하다. 주로 남부 지방에서는 벼를 수확한 뒤 이듬해 봄까지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경우가 많다. 보리나 밀, 귀리, 양파, 마늘, 감자 등 다양한 작물이 여기에 해당한다. 일반 벼는 모내기 적기가 대개 5월 말~6월 초순이지만 가루쌀은 6월 말~7월 초순으로 한 달 정도 늦다. 벼 수확까지 걸리는 기간이 일반 벼는 130~140일이지만 가루쌀은 110~115일로 짧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적기인 6월 중순에 밀을 수확하고 나서 가루쌀 모내기를 할 수 있다. 쌀 공급과잉을 해소하고 밀 자급률까지 높일 수 있는 셈이다.
오랜 노력 끝에 발굴해낸 '신의 선물'
정 장관은 가루쌀 품종에 대해 종종 '신의 선물'이라고 표현한다. 그 이유는 가루쌀의 장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행운이 따라야 하는 '돌연변이 육종'에 의해 개발된 품종 때문이기도 하다.
가루쌀 품종 개발은 좋은 형질의 쌀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돌연변이 육종을 시작한 2000년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좋은 품종으로 평가받던 '남일벼'를 원천 소재로 삼아 돌연변이 육종이 시도됐다. 먼저 남일벼 볍씨를 화학적으로 처리해 유전자 염기서열을 바꾸는 작업을 했다. 동시에 돌연변이를 일으킨 볍씨를 유전적으로 고정했다. 그렇게 대략 10년간 노력한 끝에 남일벼에서 나온 유전적 변이체 1만2000개가 만들어졌다.
2010년부터는 이 유전적 변이체를 일일이 조사해 원하는 형질을 갖는 볍씨 종자를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길고 지루한 과정 끝에 밀처럼 전분 구조가 둥글고 성긴 유전체를 발견해 '수원542호'라는 품종명으로 특허 등록한 것이 2012년 10월이었다. 이듬해에는 국제학술지에도 보고됐다. 그러나 이 품종은 단점이 있었다. 가루로 만들기는 쉬웠지만 병해충에 약했다. 수원542호 품종을 육성한 정지웅 농진청 연구관은 "가루로 만들기는 쉬웠지만 병해충에 약하다보니 당장 농가에 보급하기 어려웠다"며 "분자 육종 기술을 활용해 병해충에 강한 품종인 '조평벼'를 수원542호에 교배함으로써 농가 보급이 가능한 수준의 '바로미2호'라는 가루쌀 품종을 개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바로미2호는 2019년 최종 품종 개발이 완료돼 특허 등록됐다. 지금 재배되는 가루쌀 품종은 정확하게는 바로미2호에 해당한다. 정 장관이 농진청장에 부임했을 때는 이 바로미2호가 나오기 전에 수원542호를 개량한 '한가루' 품종이 개발된 때였다. 그는 이 품종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해외 특허를 독려했다.
정 연구관은 지금도 연구실에서 가루쌀 신품종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바로미2호의 단점을 극복한 새 품종 개발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 연구관은 "바로미2호의 단점은 기온이 높아지면 벼 이삭에서 싹이 나는 이른바 '수발아' 현상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라며 "수발아가 되면 벼 품질이 떨어지는 만큼 수발아 저항성 유전자를 가진 품종과 바로미2호를 분자 육종 기술로 교배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르면 내년에는 보다 품질이 좋은 가루쌀 품종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가루쌀 제품에 대한 시장 수요가 관건
정부는 가루쌀 생산을 빠른 속도로 늘려나갈 계획이다. 가루쌀 재배면적과 생산량은 작년 100㏊, 500t에서 올해 2000㏊, 1만t으로 20배 늘어나게 된다. 이어 내년에는 재배면적을 1만㏊, 2025년에는 1만6000㏊, 2026년에는 4만2000㏊로 확대하는 게 정부 목표다. 지금까지는 농민 반응도 긍정적이다. 이모작에 유리한 데다 직불금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시장 수요다. 아무리 가루쌀이 좋다고 해도 시장에서 가루쌀을 쓰지 않으면 소용없다. 정부가 식품업계와 적극적인 협력에 나서고 있는 것도 판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일단 출발은 좋다. 올해 초 실시된 '가루쌀 제품 개발 지원 사업자' 선정 공모에 77개 업체에서 108개 제품이 참여해 최종적으로 19개 제품이 선정됐다. 7.2대1의 경쟁률을 보인 것. 여기에는 라면과 칼국수 같은 면류, 다양한 빵과 과자류가 포함돼 있다.
가루쌀
전북 익산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가루쌀을 재배하는 이승택 미미농산 대표는 "정부 지원도 받고 우리 밀을 이모작으로 재배하다 보니 경제성까지 좋아 가루쌀 재배에 만족한다"면서도 "정부 의도대로 가루쌀 생산이 늘어날지는 결국 시장에서 판로가 얼마나 형성될지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반 쌀과 달리 가루쌀은 밀처럼 가루로 잘 분쇄되는 특성이 있다. 그동안 쌀 과잉생산을 해소하고 밀 수입을 줄이기 위해 쌀가루로 밀가루를 대체하려는 노력을 많이 해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가루쌀 품종은 밀에 가까운 성질 때문에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주장이다. 밀에 함유된 불용성 단백질인 글루텐이 사람에 따라 소화 장애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쌀에는 이 성분이 없는 것도 장점 중 하나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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