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개혁유감
김옥균이 있었다. 1872년 불과 스물한 살에 문과 알성시(謁聖試)에 장원급제할 만큼 역량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힘 있는 세도가의 일원이었음에도,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근대 개혁을 위해 신분을 초월한 비밀결사를 결의할 만큼 포부도, 결기도 대단했다. 이러한 김옥균을 중심으로 모인 일군의 세력이 이른바 '급진 개화파'였다. 이들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달리 봉건체제에 머물러 있는 조선을 근대 사회로 이끌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정강 14조를 선포했다.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하고 신분제를 철폐하며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등 오늘날의 관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내 실패하고 만다. 이것이 잘 알려진 '삼일천하'다.
그보다 앞서 조광조도 있었다. 1515년 8월 알성시 급제 이후 같은 해 11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곧장 제출한 상소를 통해 조광조는 조선 조정에 커다란 풍파를 일으킨다. 대간(臺諫)은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 직분임에도, 왕에 대한 상소의 내용을 이유로 박상과 김정을 처벌하자고 나섰던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을 전원 파직하라는 취지였다. 당시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은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종묘와 사직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유배당한 상황이었다. 본격적으로 출사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대범함이었다. 이를 통해 조광조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도 사림(士林)의 대표 격이 된다. 이러한 권력과 역량을 바탕으로 조광조는 여러 개혁에 나선다. 대표적인 것이 노비종모법, 한전제, 수미법, 위훈 삭제 등이다. 이를 통해 당시 제도가 드러내고 있던 모순을 고치고자 했지만,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은 기묘사화로 일순간 몰락하고 말았다.
실패한 개혁을 서두에 꺼내었지만, 역사는 오히려 정체와 반동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전진에 전진을 거듭해왔다. 거대한 역사의 물결은 결코 멈추거나 후퇴함 없이 면면히 흐른다. 격렬한 대립, 심지어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광범위한 생산량의 증대나 보편적 인권의 증진을 향하여 온 인류의 역사가,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거치고도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경제화에 있어 커다란 성공을 이룬 우리 대한민국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정치개혁, 제도개혁, 산업구조개혁 등 수많은 개혁의 성공이 있었다.
더 나아가 개혁이 없다면 그 사회는 유지는커녕 퇴보만을 향해갈 것이다. 모든 제도나 문화는 그것이 만들어질 당시 시점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에 만들어진 순간부터 다시 개선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 인구정책과 관련해 순차적으로 등장했던 표어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모두 당시에는 필요한 문구였지만 오늘날 여기에 동의하는 정책 입안자는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실패한 개혁을 떠올린 이유는 우리가 개혁 과잉(改革 過剩)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단어에 개혁이 붙는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종교개혁, 농지개혁, 이제는 정언명령처럼 나도는 정치개혁, 규제개혁 등에 윤석열 대통령은 노동개혁, 연금개혁, 교육개혁을 3대 개혁과제로 얹었다.
올 초에는 정부개혁이라는 말도 꺼내 들었다. 청문회를 기다리는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는 여당으로부터 방송개혁의 적임자로 꼽힌다. 금융개혁, 국방개혁, 사법개혁, 제도개혁, 선거제 개혁 등도 익숙한 단어다. 전 정부 역시 검찰개혁, 언론개혁 등을 추진하며 개혁에 공을 들였다. 유사품으로 혁신(革新)이 있다. 현 정부 들어 국방개혁을 대체한 국방혁신은 물론 각종 법률에서도 혁신은 자주 등장한다. 정당도 혁신을 좋아한다. 더불어민주당도 최근까지 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켜 활동해왔고, 다른 정당도 선거 전후로 혁신위원회를 꾸려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수많은 개혁 가운데 성공한 개혁의 소식이 들려오지는 않는다. 수많은 정치개혁 시도에도 시민으로부터 외면받는 정치의 현실은 나아지지 않는다. 전 정부가 공들여 추진한 검찰개혁은 이른바 시행령 입법으로 무력화되고 있다. 최근 우리 당 혁신위 역시 논란 끝에 급하게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현 정부 역시 개혁을 이야기할 때마다 건폭, 카르텔 등의 용어로 국민의 일부를 악마화하며 본질보다 편 가르기에 열중이다. 그러다 보니 논란이 일 때마다 부처가 대통령의 진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며 희생양을 찾을 뿐이다. 이렇게 생채기가 나서는 이번에도 누구든 개혁에 성공하기는 난망이다.
결국 중요한 점은 속도보다 개혁, 혁신의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추진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의지도 중요하고 충분한 권한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공감대다.
다시 서두로 돌아가자면, 김옥균은 이상적인 정책을 발표하고도 그 수혜 대상인 민중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여 실패했다. 실패 직후 정변을 주도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하자 수많은 민중이 일본공사관을 공격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준비 부족, 홍보부족, 상대는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 1500여명에 조선군 100명에 달함에도 개화파가 이끄는 병력은 100여명, 지원군이었던 일본군조차 200여명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했던 조직력 등도 실패의 원인이 되었겠지만, 민중의 전적인 공감대가 있었다면 삼일 만의 허무한 실패는 없었을 것이다.
조광조 역시 타협 없는 급진적 정책으로 상대적으로 경륜이 부족했던 젊은 사림 이외 훈구세력, 무엇보다 당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자인 왕의 공감대를 얻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상대와 사회, 역사와 맥락에 대한 이해없이 오직 이상주의적 세계관에만 매몰된 탓일 것이다. 개혁과잉시대, 그 와중에 성공한 개혁은 드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이나 내용 가운데 하나는 창의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일반적, 익숙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재미있는 글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방점은 익숙함에 있다. 형식과 내용이 모두 익숙하면 그래도 몇은 읽을 법한 진부한 글이 될 뿐이지만, 둘 다 창의적이면 누구도 읽지 못할 거북함을 주기 때문이다. 글 하나도 그렇다.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개혁·혁신이야 말해 무엇하랴.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또다시 개혁해야 할 것이다.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 intoan429@gmail.com
〈필자〉안규백 의원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성균관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8~21대 국회의원직을 이어 오고 있으며, 상임위로는 외교안보 분야 전문성을 쌓고 있다. 민주당 전신인 평화민주당 공채 1기로 정치에 입문해 원내수석부대표, 전략홍보본부장, 서울시당위원장,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본부 조직2국장,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무본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국회 활동을 하면서 해외 의회와의 친선 교류에도 힘썼다. 20대 국회에선 한·베네수엘라 국회의원 친선협회장, 한·중 국회의원 외교협의회 부회장, 한·노르웨이 국회의원 친선협회 이사로 활동했다.
Copyright © 전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삼성, 반도체 혁신기술 '후면전력공급' 꺼낸다
- 제네시스 GV80도 전동화…디젤 빼고 'MHEV' 넣는다
- 특허소송 승소율, 변리사 대리 인정 日 50% > 韓 30%
- 씨아이에스, 대구 3공장 본격 가동 돌입···생산 능력 2배 ↑
- 더 똑똑해진 취업준비…생성형 AI 기반 구직 서비스 부상
- [ICT시사용어]대학 기술지주회사
- 호실적 쓴 국내 톱5 제약사, 하반기 신약 효과 '기대'
- 케이뱅크, 가상계좌 오픈API 선보인다...뱅킹서비스 시너지↑
- 데이터센터, 침수피해도 방지해야…내년 1월부터 규제 강화 정책 시행
- 서울시, 업무자동화로 '시간 단축'...VDI와 RPA 콜라보도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