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은 ‘책과의 전쟁’ 중
출판계 반발하며 17일 집회 예고
“대안 없이 없애기만 하면 정책 아냐”
“문학상 수상 등 열매에만 관심·축적엔 무관심”
지금 대한민국은 ‘책과의 전쟁’ 중이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지난 6월 ‘K북 비전 선포식’을 열고 출판계 지원책을 내놨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울국제도서전과 관련,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대해 수사를 의뢰했으며 각종 출판지원 사업을 축소·폐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대 출판지원책인 세종도서 사업의 부실운영 등을 지적하면서 올해 사업이 뒤늦게 진행된 데 이어 문학나눔 사업 또한 예산이 전면 삭감되는 등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출판 진흥을 꾀한다면서 지원을 축소하고 출판단체와 ‘전면전’을 벌이는 모양새다. 출판계는 17일 문체부의 출판지원 예산 삭감 등에 항의하는 집회를 연다.
출판·문학 전방위적 지원 축소
시작은 지난 5월이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5월21일 보도자료를 내고 세종도서사업의 부실운영 등을 문제 삼으며 구조적 개편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정부 출판지원사업 가운데 최대 규모인 84억원 예산의 세종도서사업은 우수 학술도서 400종, 교양도서 550종을 선정해 전국 도서관 등에 공급하는 정책이다. 정부는 심사위원 자격, 심사기준 등의 부실을 이유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며 올해 사업 시행을 미뤄 출판계의 우려와 반발을 샀다.
올해 13만명이 찾아 흥행을 이룬 서울국제도서전은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됐다. 문체부는 지난 3일 수익금 누락, 불투명한 회계처리 등을 이유로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장과 주일우 서울국제도서전 대표를 서울경찰청에 수사의뢰했다. ‘이권 카르텔’ ‘재정적 파탄’ 등의 강한 표현을 쓰며 날을 세웠다.
문학 분야 또한 예외가 아니다. 우수한 문학도서를 선정해 도서관·지역문학관·사회복지시설 등에 보급하는 문학나눔사업 또한 예산 51억원 전액 삭감이 검토되며 폐지될 상황에 처했다. 문체부는 또한 한국문학번역원에 대한 감사 결과 심사과정 공정성 부족, 예산관리 비효율, 사업관리 부실 등을 지적했다. 심사기준 가운데 작품성이 40%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도 지적 사항에 포함됐다.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출판·도서 지원사업을 잇따라 폐지한다. 서울시는 당초 작은도서관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가 시민들이 반발하자 뒤늦게 예산을 편성했다. 출판사들이 많이 모여 있어 ‘출판 특구’로 지정된 마포구 또한 출판지원 축소로 갈등을 겪고 있다. 마포구는 박강수 구청장 취임 이후 작은도서관을 폐관하고 예산 삭감에 반대한 마포중앙도서관장을 파면했다. 1인 출판사들을 지원하는 등의 역할을 해온 출판문화진흥센터(플랫폼P)의 입주요건을 마포구민으로 제한하고 일부 시설을 청년창업지원센터로 바꾸면서 갈등을 빚고 있다.
먹구름 낀 출판계…17일 집회 예고
출협은 박 장관 해임을 요구하면서 혐의가 입증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언론에 일방적으로 공표한 것을 두고 명예훼손 등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윤철호 출협 회장은 “출협이 회계적으로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도서전을 66년째 운영해왔으며, 문체부에서도 수십년 동안 같은 담당자와 함께 일해왔는데 갑자기 문제 삼고 나선 이유를 모르겠다. 장관이 출판계와 진지한 대화를 나눠 책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생산적 논의를 하는게 아니라 출판계와 싸우려고 하는 모양새”라고 밝혔다. 출협은 문체부의 수사의뢰 이후 보도자료를 내고 문체부가 서울국제도서전 관련 계좌를 별도로 관리하라고 요구한 것은 2022년이며, 이후 개별 관리해왔는데 이를 소급적용해 문제 삼는 것은 고의적 흠집내기라고 반박했다.
17일 서울 용산구 문체부 서울사무소 앞에서 예정된 범출판문화계 집회에 대해서는 “6월에 집회신고를 한 것으로 문체부의 감사 및 수사의뢰와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윤 회장은 “세종도서·문학나눔 사업 등 지원들이 대폭 없어지고 축소되는 부분에 문제제기하면서 도서관 도서구입 예산 증액을 요구할 것”이라며 “학술도서 불법복제 등을 금지하는 저작권법 개정문제 등 출판계가 원하는 핵심 사안을 함께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17일 집회엔 20여개 출판 관련 단체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출협은 학문과 학술도서 분야에서 체감하는 매출 하락은 20~30% 이상이라며 “2~ 3년 더 지나면 학술 및 고등교육 출판 분야는 사멸할 것 같다”고 우려했다. 2021년 6만5000여 종에 이르던 출간 종수도 지난해 6만1000여 종으로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출협은 “출판은 벼랑 끝에 몰렸는데 문체부는 저자와 출판을 지원하는 예산을 전면 삭감하려 하고 있고,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지원 예산 역시 몇 년 새 반토막이 나 있다”고 덧붙였다.
전임 정권에서 임명된 기관장들의 해임을 위한 구실로 감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세종도서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출판진흥원의 김준희 전 원장은 문체부가 서울국제도서전 관련 ‘이권 카르텔’을 지적한 지난달 24일 사퇴 의사를 밝혔다. 출협은 “압력을 못 이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은 장관에게 사표를 냈다. 한국문학번역원장도 끊임없이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고 한다. 모두 지난 정권 시기 임명된 인사들”이라며 “문체부 내에도 수백억씩 묶여있고 낭비되고 있는 예산은 보지도 못한 채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대안 없는 흠집잡기, 누구를 위한 ‘K북’인가
문체부는 지난 6월 ‘K북 비전 선포식’을 열고 10대 추진과제를 발표했다. 1인·중소 출판사 지원, 웹소설 분야 인력 양성, 도서관·지역문학관 신규 건립, 장애인 전자책 접근성 강화, 신진 창작자 권리 보호 등이 포함됐다. 15일엔 예정에 없던 보도자료를 내놓으며 출판계가 요구해온 대학가 교재 등 출판물 불법 복제·유통을 단속하겠다고 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문체부에서 ‘이것’을 하겠다는 게 보이지 않는다. 기존 정책을 흠집만 내고 대안이 없다. 하자는 것 없이 하기 싫은 걸 없애는 쪽으로만 하면 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 장관이 한국문학이 “세계 3대 문학상(노벨 문학상, 공쿠르상, 부커상)을 수상할 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공쿠르상은 프랑스어 문학에 수여하는 상이기 때문에 번역 작품은 수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 대표는 “정부 정책이 현장과 너무 멀어졌다. 세종도서·문학나눔 사업을 축소하면 작은 출판사와 작품성은 있지만 인지도가 작은 작가들이 고통을 받는다”며 “누구를, 무엇을 위한 정책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고 밝혔다.
장 대표는 번역원 감사에서 심사 기준에 ‘작품성’ 항목 비중이 제일 높은 점, 2021년 하반기 지원작 가운데 1건만 현지 출판된 점을 문제삼은 것에 대해 “문체부가 바라는 ‘세계 3대 문학상’은 문학성이 있을 때만 받을 수 있고, 문학성은 번역과 출판에 시간과 공을 들일 때 가능하다. 그 기간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단기간 실적으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고영직 문학평론가는 “문체부는 외국 문학상 수상 등 ‘열매’를 취하는 데는 관심이 많지만, 축적을 위해 바탕을 마련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며 “번역·출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공허한 트집잡기로 가득하다.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기관장에 대한 물갈이를 예고한 것으로 풀이하는 현장 문학인들이 여럿”이라고 말했다.
문체부가 영상 콘텐츠엔 세액을 공제하는 등 혜택을 주면서 출판업은 배제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국출판인회의는 “문체부가 K북을 육성한다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세제 지원에서 출판업을 배제하고 있다”며 문체부에 출판인과의 간담회를 요청했다.
문체부 관계자는 세종도서·문학나눔 사업 예산 삭감에 대해서는 “정부 예산안을 편성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확정된 것이 없다”고 밝혔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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