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통계학의 거목 윤기중 교수… 아들 지갑 채워주던 세심한 아버지
90세 넘어서도 제자 밥 사주며 격려
尹 대통령에겐 “부정한 돈 받지마라”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함께 식사하면 꼭 본인이 계산하셨어요. 잘 성장해줘서 고맙다면서. 그만큼 후배와 제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분입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광복절인 8월 15일 별세한 윤기중(92) 연세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통계학의 기틀을 잡은 거목(巨木)이자 아들인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평소 성실과 원칙을 엄격하게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심하고 자상한 면모를 보여 많은 이가 고인을 따랐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윤 교수는 1956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58년 같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61년부터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한·일 수교 직후인 1967년 일본 문부성 국비 장학생 1호로 선발돼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68년 귀국한 고인은 연세대 상경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쳐 1973~1997년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교수(학과 창립 멤버)로 일했고, 1991~1993년 연세대 상경대학장을 지냈다. 한국통계학회장(1977~1979년),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객원교수(1982~1983년), 한국경제학회장(1992~1993년) 등으로도 활동했다.
고인이 집필한 통계학(1965년)과 수리통계학(1974년), 통계학개론(1983년) 등은 국내 통계학의 기반을 닦은 대표적 총론 교재로 꼽힌다. 한국경제의 불평등 분석(1997년)과 같은 유명 저서를 쓰기도 했다. 연세대에서 고인 강의를 들었다는 한 제자는 윤 교수의 후학(後學) 양성 의지에 대해 “매 수업 칠판 왼쪽 위 맨 끝에서 오른쪽 맨 아래까지 글씨를 빼곡히 적으며 열정적으로 가르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했다.
윤 교수는 제자들에게 숫자뿐 아니라 인간과 철학에 관한 얘기도 자주 했다고 한다.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는 월간조선과 인터뷰에서 스승인 윤 교수를 “지금까지 모신 은사 가운데 진정한 참스승이며 가장 멋진 분”이라고 표현했다.
많은 후배가 존경하는 고인의 면모는 박사 학위 거부 일화에도 잘 나타난다. 윤 교수에게는 박사 학위가 없었다. 고인이 교수로 임용된 1960년대는 석사 학위만 있어도 대학교수를 할 수 있던 시절이다. 당시 석사 출신 교수가 간단한 논문을 쓴 다음 다른 대학교수에게 심사받아 통과하면 박사 학위를 주는 ‘구제(舊制) 박사’ 제도가 있었는데, 고인은 이 쉬운 길을 거부했다. 꼼수라는 이유에서다.
원칙을 중시하는 윤 대통령의 성격도 윤 교수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지인들은 입을 모은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고인의 강직한 성품을 주변 모두가 존경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출신인 고인의 또 다른 제자는 “늘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 제자에게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셨다. 선비셨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자식에게 예절 교육을 엄격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다정한 아버지였다. 윤 교수는 윤 대통령이 검사로 일하던 시절 입버릇처럼 ‘부정한 돈을 받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항상 아들의 빈 지갑을 슬쩍 채워줬다고 한다. 비교적 늦은 32세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아들이 연수원 동기들 사이에서 리더 역할을 하느라 돈 쓸 일이 많다는 걸 알고 행한 배려다. 윤 대통령에게 고인은 정신적 기둥이었다.
윤 대통령이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책 한 권을 선물하기도 했다.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쓴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였다. 이 책에서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고인의 시선은 늘 서민을 향했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 평생의 관심이 양극화와 빈부격차였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월간 ‘사상계’에 실린 김지하 시인의 ‘오적’을 윤 대통령에게 직접 읽어줄 정도로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열린 교육을 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작년 6월 고인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로 초대해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고인은 윤 대통령에 국민만 바라보라고 조언했다.
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부친과 추억담을 자주 꺼냈다고 한다. 올해 3월 일본 도쿄를 방문해서는 윤 교수와 어린 시절 제국호텔에서 커피를 마셨던 일화를 들려주며 감회에 젖었다.
윤 교수는 2019년 당시 건강이 나빠진 아내를 위해 충남 공주에 내려가기도 했다. 김인규 교수에 따르면 고인은 “젊을 때 제자들을 챙기면서 집사람 건강은 잘 챙겨주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며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웃에게도 다정했다. 지난해 대선 직후 고인 부부 집 앞에 이웃이 축하 꽃다발과 현수막을 뒀는데, 이를 알게 된 윤 교수가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 감사드려요. 가까이에 저희를 아껴주시는 이웃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어요”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장례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3일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윤 대통령은 국정 공백이 없도록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며 “애도를 표해준 국민 여러분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했다“고 했다. 현직 대통령이 임기 중 부친상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임기 중 부모상은 지난 2019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상 이후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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