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프로메테우스의 신화’ 오펜하이머… 원자폭탄의 무게에 짓눌린 천재의 영혼 [엄형준의 씬세계]

엄형준 2023. 8. 1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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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15일 개봉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자 군축의 상징… 오펜하이머의 생애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원작… 진실 바탕 둔 전기물
원작·배우의 힘… 인물관계와 클로즈업 연출로 긴장감 유지
영화적 해석 더한 논픽션에 가까운 픽션… 일부 사실 왜곡
아인슈타인과 대화 없던 일… 원폭투하의 배경 생략 아쉬워
인간의 역사에 있어 그만큼 세계 보편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만든 창조물을 결코 볼 수 없고, 그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누구나 그의 그림자 안에서 살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영화 ‘오펜하이머’를 통해 위대한 현대 과학자 중 한 명이자 원자폭탄의 아버지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21세기로 불러냈다.

영화는 사전 예매 티켓 40만장을 넘어서며 15일 개봉 전부터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이미 글로벌 흥행 수익은 6억4900만달러를 넘겼다.

이 영화가 이처럼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뭘까. 오펜하이머가 ‘다크 나이트’,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새로우면서도 장엄한 연출 스타일을 선보여 온 놀런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과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강렬한 장면이 담긴 예고편의 효과인 듯하다.

영화는 2006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원작으로 한다. 그리스의 반항적인 신인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대가로, 캅카스 산의 바위에 사슬로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 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상처는 밤이면 아물었고, 고통은 매일 반복됐다.
오펜하이머는 전쟁 영웅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몇년 뒤 시작된 비공개 청문회를 통해 고통 받고, 활력을 잃는다.
오펜하이머는 혼자 힘으로 원자폭탄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탁월한 아이디어와 리더십으로 수많은 과학자가 참여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며, 미국에 세계 첫 원자폭탄을 안겨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독일과 누가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지 경쟁 중이었고, 오펜하이머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것(원자폭탄) 때문에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며 인류의 전쟁을 종식시키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오만한 생각이었으며, 이 가공할 무기가 인류 전체에 엄청난 위기를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을 오펜하이머가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도덕적으로 고통받았고, 정적은 독수리처럼 그의 심장을 후벼 팠다.
루이스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와 대립한 인물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분해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그는 일본의 항복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지 사흘 만에 수십 년 동안 미국이 핵무기 분야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없고, 설령 주도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자체를 끔찍한 파괴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썼다. 최악의 경우 각국이 서로에게 핵을 쓰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믿은 오펜하이머는 전쟁 자체를 막기 위해, 구소련과의 협력과 세계기구를 통한 핵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군축’을 주장했다. 젊은 시절 한때 공산주의 사상에 매료됐고, 공산당 사상에 경도된 친구가 많았던 이 중요 인물을 기다리는 건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 그를 소련의 스파이로 몰고 가는 정적의 공격이었다. 그는 미국에 전쟁 승리와 절대적 힘을 안겨줬지만, 위험인물로 분류돼 국가로부터 모욕당하고, 감시받았다.

영화는 1000페이지가 넘는 장대한 평전을 3시간으로 줄이는 미덕을 발휘했지만, 복잡다단한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감독은 관객의 관심을 끌기에 적합한 대목인 원자폭탄 개발 과정과 그 후 그를 매장하기 위한 청문회, 그리고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하는 인간관계를 담는 데 집중한다.

오펜하이머는 미국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한 물리학자다. 영화 속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원자폭탄 폭파 시험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영화는 핵 실험 장면이 담긴 예고편 이상의 스펙타클한 장면은 없다. 대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오펜하이머가 지녔던 고민과 압박감을 전달함으로써 관객을 당시의 사건에 끌어들인다. 원작 자체로 시나리오는 힘을 얻고, 영화는 놀런의 역대 흥행작 중 가장 얌전한 연출 작품임에도 시간의 재구성과 흑백·컬러의 대비, 클로즈업을 통해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는 킬리언 머피(오펜하이머 역)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루이스 스트로스 역), 맷 데이먼(레슬리 그로버스 역), 제이슨 클라크(로저 롭 역) 등 쟁쟁한 배우의 흡입력 있는 연기 때문이기도 하다.

깊은 무게감을 지닌 영화는 단번에 흐름을 모두 파악하거나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는 아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점은 이 전기적인 영화가 긴 이야기를 축약하고 흥미를 더하며 일부 사실을 왜곡한 논픽션에 가까운 픽션이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역사의 많은 부분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지만, 모든 부분을 진실로 믿어선 안된다. 영화는 이미 항복을 계획하고 있는 일본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의 어떤 부분은 대사까지 원작과 정확히 일치하지만, 어떤 부분은 전혀 사실관계가 다르다. 영화의 대부분은 역사적 기록에 가깝지만, 모든 부분을 진실로 믿어선 안 된다.

일례로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에게 어떤 조언을 구하는데 역사 속에서 그가 만난 인물은 아서 콤프턴이다.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과 인간적으론 가까웠지만, 학술적으로는 대립하는 사이였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반핵 메시지를 담은 3시간 분량의 이 영화가, 미국 관객이 싫어하거나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오펜하이머를 이해하는 데도 빠질 수 없는, 원자폭탄의 일본 투하 결정 배경에 대한 짧지만 중요한 사실을 바꾸거나 생략했다는 점이다. 

영화에선 일본이 항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한다는 미국 전쟁지휘부 핵심 인사들과 오펜하이머의 회의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회의에서 이 문제는 다뤄지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몰랐지만, 당시 미 당국은 일본이 항복을 예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일본이 미국이 아닌 소련에 항복 의사를 밝힐까 봐 초조했고, 미국은 전후 주도권 확보를 위해 핵 사용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오펜하이머가 정부에게 속았다고 믿게 되고, 핵무기의 오용을 우려하며 미국 우익과 각을 세우게 된 중요한 배경이다.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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