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헌신한 ‘외국인’ 석호필·쇼 기념우표[우정이야기]

2023. 8. 15.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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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사업본부는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우정사업본부 제공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는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을 주제로 기념우표 62만4000장을 발행했다. 우정사업본부는 그간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 역사 속의 태극기 등을 광복절 기념우표로 발행했는데 올해는 한국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선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8월 14일 발행되는 제78주년 광복절 기념우표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한국명 석호필)와 조지 루이스 쇼(1880~1943) 2명의 초상이 담겨 있다. 우표 전지에는 스코필드가 3·1운동 당시 모습을 촬영한 대한문 앞 만세 시위 사진, 그리고 쇼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는 1920년 8월 11일 자 동아일보 기사가 기록됐다.

영국 태생인 프랭크 스코필드는 캐나다에서 의학자이자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내한했다. 내한 초기엔 영어로 강의를 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방문 이듬해 한국어 시험을 보고 선교사 자격을 받은 뒤 석호필(石虎弼)이란 한국어 이름을 만들었다. 당시 학생들과 더 깊은 친분을 맺기 위함이었다. 석호필은 영어이름을 음차한 것인데 ‘단단하고 무섭게 남을 돕는다’는 자신의 철학을 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1919년 3·1운동 첫날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해 해외에 알렸다. 특히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 사건을 국내와 해외에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제암리교회 사건은 일제가 제암리 마을 주민들을 교회에 소집시킨 뒤 총을 난사하고 불을 질러 양민 26명을 학살한 일이었다. 당시 스코필드는 제암리에 잠입해 총살 방화 현장을 촬영하고 일제의 만행을 보고서로 남기며 해외에 알리는 데 힘썼다. 그로 인해 일본 언론에서도 제암리 학살 사건을 비판하는 기사가 나오는 등 일본 제국주의 잔혹상이 국내외에 널리 퍼졌다. 스코필드는 영국인이자 캐나다인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거나 친분이 있는 일본 경무국장을 통해 3·1운동으로 일제에 붙잡힌 학생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한국인을 돕는 스코필드의 행위가 조선총독부에 알려지면서 1920년 그는 강제 출국을 당했다. 캐나다에 돌아간 스코필드는 틈틈이 강연과 기고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알리며 일제를 비판했다. 광복 이후 다시 내한해 강연과 언론 기고를 통해 한국인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70년 4월 12일에 서거한 그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한편 쇼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중국 안동현(현 단둥)에서 무역업과 선박업을 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적극 지원한 사업가다. 자신의 회사인 이륭양행이 치외법권 지역에 있는 점을 이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사무국을 설치하도록 도왔다. 또 회사 선박으로 독립운동가들과 무기·출판물·자금 등을 안전하게 운송·보관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1920년 7월 일제에 내란죄로 기소돼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중국 안동으로 돌아간 뒤에도 1938년까지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1943년 11월 푸저우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1963년에 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윤지원 경제부 기자 yj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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