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 출신 간호사가 15살 연상 독립운동가에 반한 '이유'
'공기가 밥이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코앞까지 다가온 폐병에 짓눌려 천지에 널린 공기조차 마음껏 흡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가느다란 숨이 끊어지기 전, 그는 겨우 눈을 떠 방을 둘러봤다. 남편이 태어나 자란 집. 자식 둘을 먼저 떠나보낸 집. 궁녀이자 간호사, 산파였던 독립운동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1. 1919년 중국 베이징.
"자혜야! 박자혜!"
"세상에…이게 누구셔요? 예조참판댁 계진 아가씨 아니세요?"
흥선대원군의 둘째 사위 조정구의 딸 조계진 아가씨였다. 예조참판을 거친 조정구가 왕실 의례를 담당하는 서리대신사무와 왕실 비서실장 격인 기로소비서장직을 맡은 덕에 당시 생각시였던 자혜와는 운현궁에서 자주 얼굴을 보곤 했다.
"응 이게 얼마 만이야! 북경에는 무슨 일로 온거야?"
자혜가 특유의 씩씩한 어투로 말했다.
"조선총독부 간호사 때려 치웠어요. 3.1 독립운동 때 환자들 보고 어찌나 열이 받던지. 친구한테 가짜 전보 치게 해서 총독부에 2주 휴가 받고 바로 만주로 온 거예요."
"괜…찮은거야?"
계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자혜가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병원에서 간우회 만들어서 시위하다가 진즉에 찍혔는데요. 저 경무부 블랙리스트에도 올랐잖아요."
경무부 보고서인 '사찰휘보'에 자혜는 '악질적인 여자'라고 올라가 있었다. 만세 행렬에 참가해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도 받았던 자혜였다.
"그래도 우응규 어르신 덕분에 연경대학에 들어갔어요. 지금 의예과에서 공부중이에요."
"우와 대단하다. 자혜는 정말 간호사가 천직이구나! 오늘 우리 집에 가서 식사 하고 가. 아버님 어머님께 인사도 드리고."
계진이 자혜의 손을 잡아 끌었다. 지난해 결혼식을 올린 계진의 '웨딩마치'는 독립운동 그 자체였다. 고종을 국외로 빼돌리려는 엄청난 계획을 숨기기 위해 아버지 조정구의 명령으로 우당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과 1918년 혼인을 올린 참이었다.
"아버님이면, 신흥무관학교 세우신 이회영 선생님이시죠?"
조계진과 이규학의 결혼은 고종을 빼돌리기 위한 연막 작전과도 같았지만 그 자체로도 충격적인 '뉴스'였다. 적대시하던 두 가문이 혼례로 맺어지는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일이었다.
"소론 백사공파 경주이씨랑 노론 풍양조씨가 사돈 맺는다고 하면 이전엔 아무도 안 믿었을거야. 나라를 잃어버리니 으르렁 거리며 싸우던 분들도 이렇게 손을 잡네."
하지만 고종이 독살로 추정되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며 프로젝트는 실패했고, 이회영은 아들 부부와 북경으로 망명했다.
"어머님, 궁에서 자주 보던 생각시여요. 조선총독부 간호부 나와서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해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수재랍니다."
계진의 시어머니이자 우당의 부인 이은숙이 자혜를 유심히 살폈다. 씩씩하고 서글서글한 눈매에 계진의 시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나이가 몇 인가요? 혼인은 아직 안 했고?"
자혜가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25살입니다. 일하고 공부하느라고 아직 혼인하지 못했습니다."
"음…그럼 혹시 내가 누구 소개시켜 줘도 괜찮을까? 위로 몇 살까지 괜찮아요?"
"…예?"
#2. 독립운동가의 사랑과 전쟁
남자 환자도 거침없이 다루는 자혜지만 중매 자리에 앉아 있자니 만나기도 전부터 좀이 쑤시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계진의 시어머니가 급 제안한 '남소'(남자 소개)에 얼떨결에 응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기자라니.
"인사해요. 이쪽은 내가 전에 말한 분."
자혜가 급하게 일어섰다. 말끔한 얼굴의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채호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자혜와 눈이 마주치자 고요하던 그의 눈동자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남자는 25살 자혜보다 15살이나 더 많았다. 마흔인 그는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전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가 사망하자 '결별'을 통보했고, 자혜와 혼인했다.
자혜는 모든 사실을 알고도 그의 청혼을 승락했다. 그리고 지독한 '가난'이 시작됐다.
신혼 초, 남편은 "나는 가정에 등한한 남편"이라고 선포하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오지도 않았다. 생계와 육아는 모두 자혜의 몫이었다.
하지만 자혜는 불평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그는 다시 서울로 와 '주말부부'를 시작했다. 간호사였던 전직을 살려 산파 면허를 받고 인사동에 사무실을 냈지만 이미 경무부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녀의 밥벌이는 경찰의 감시에 온전하지 못했다.
한 달 중 아궁이에 불 때는 날은 4~5일뿐, 30일 동안 아홉 끼니밖에 먹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서울에 만세운동, 독립운동 첩보만 돌면 경찰은 자혜를 잡아 족쳤다. 하루 걸러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심문당하고 맞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남편이 경찰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편은 1심 공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형을 다 채우지 못하고 6년 뒤인 1936년 2월 뤼순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종로구 셋방 자혜의 집 앞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남편이 사망하셨는데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가요?"
자혜는 아들의 손을 잡고 뤼순 감옥으로 향했다.
"내 남편은 17년 동안의 결혼 생활 내내 가족보다는 나라를 위해 싸웠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애써왔습니다."
#3. 독립을 위해 병실에서, 거리에서 싸웠던 간호사들
두 아들을 앞세우고 찢어지는 가난과 병고 속에서 고통받던 그녀는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80여년 뒤, 2023년 8월 15일. 단재 신채호와 그의 아내 박자혜가 잠들어 있는 충북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 묘역에 대한간호협회 회원들이 모였다. 간호협회는 광복절인 15일 독립운동가 박자혜 간호사 추모행사를 열었다.
간호협회는 지난 2008년부터 간호역사뿌리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독립운동가 간호사를 발굴하고 있다.
올해에는 독립운동을 한 간호사 30명이 독립유공자로 추가 선정됐다. 이에 따라 간호협회가 발굴한 독립운동가 간호사 74명 중 서훈을 받은 간호사는 기존 28명을 포함해 모두 58명으로 늘었다.
독립유공자로 추가 선정돼 대통령표창이 추서된 간호사 30명은 1919년 세브란스병원과 동대문부인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에 기여했다.
독립운동가 간호사는 △강아영 △김덕신 △김려(여)운 △김병숙 △김복수 △김복신 △김봉덕 △김성학 △김순경 △김영순 △김오선 △김은도 △김현미 △박경숙 △박옥신 △박은덕 △박제옥 △배은경 △서수신 △원경애 △이성효 △이약한 △장옥순 △장의숙 △전사덕 △조은실 △조흥원 △지성숙 △최명애 △함명숙 등이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포상된 1949년부터 2023년 3.1절까지 1만7748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으며 이중 여성은 640명이다.
국가보훈부 박민식 장관은 "일제강점이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신을 바치셨던 선열들의 고귀한 생애와 정신이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온전히 계승될 수 있도록 선양하는 데 힘쓰겠다"며 "앞으로도 독립유공자 포상 확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간호협회 김영경 회장은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 간호사 74인을 기억하겠습니다'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평생을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으신 74분의 뜨거운 애국충정을 50만 간호사와 12만 예비간호사 모두 마음에 깊이 새겨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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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조혜령 기자 tooderigirl@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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