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 박물관’ 경기도 [창간 35주년, 지역의 힘]
수원화성·남한산성 등 세계 건축유산 ‘우뚝’
도내 조선왕릉 31기 사찰 문화재도 집중 분포
“나라의 최후 보루, 왕릉이 자리한 근본의 땅”. 예로부터 경기도는 도성을 에워싸는 지리적 형태로 ‘나라의 배꼽’으로 불리며 왕실과 도성을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 서울에 무덤을 만들지 않고 소나무를 베지 않았던 조선의 문화로 인해 도성과 인접한 경기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 등이 자리 잡았다. 이처럼 경기도는 우리 역사의 중심무대였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600여년 역사의 문화가 보석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약 35만년 전, 연천 전곡리 한탄강변에 호모사피엔스가 ‘전곡리 주먹도끼’를 만들어 사용했던 흔적부터 현대사의 아픔이 담겼지만 역설적으로 위대한 유산이 된 ‘DMZ’까지 1천여개의 문화재를 품고 있다. 살아있는 ‘역사 박물관’인 경기도가 이 같은 지역의 문화유산을 통해 세계로 뻗어나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 ‘역사의 보고’ 경기도의 위상
경기도에는 13점의 국보, 189점의 보물을 비롯해 1천245점(지난 6월 기준)의 문화재가 있다. 경기도는 고려시대의 개성, 조선시대의 한양, 지금의 서울을 품어왔기 때문에 늘 창과 방패가 부딪치는 권력투쟁의 현장이었다.
이에 따라 경기도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여겼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남한산성, 수원화성을 포함해 북한산성, 문수산성 등 길이가 무려 5~10㎞에 달하는 초대형 산성이 많은 이유다.
특히 정조는 “미려(美麗)함이 적(敵)에게 두려움을 준다”며 아름답게 성을 만드는 것도 적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다산 정약용, 번암 채제공 등 유능한 실학자들을 불러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어내길 주문한 덕에 수원화성은 세계가 인정한 건축유산으로 자리잡게 됐다.
이 같은 특징은 삼국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경기도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성곽이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다. 연천군의 호로고루는 대표적인 고구려 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고구려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또 연천군의 대전리산성, 여주시의 파사성 등 후기신라의 유적도 집중적으로 분포해 ‘삼국문화의 전시장’이라 불린다.
또 하나의 세계유산인 조성왕릉은 40기 중 무려 31기가 경기도에 있다. 왕릉은 도성을 중심으로 4㎞ 밖, 40㎞ 안에 자리잡아야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경기도가 명당이었다. 이처럼 능원이 있는 곳엔 전용 원찰을 건립했기 때문에 경기도에는 왕릉을 따라 용주사 등 조선시대 사찰 문화재도 집중 분포해 있다. 이 밖에 경기도는 자기 문화가 처음 꽃핀 곳으로, 고려백자 등이 이를 입증한다.
경기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경기도는 사통팔달로 열려 있고, 산과 강, 바다의 길목에서 사람이 모여들어 소통하던 곳이었다”며 “바다와 강을 따라 적이 침투하고 종교가 전파되고 새로운 문명이 들어왔으며 지역 면적도 넓기 때문에 문화강성 지역으로 역사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세계로 뻗어가는 ‘문화 강성’ 경기도
다양한 문화자원을 가진 경기도는 지역의 고유성과 대표성을 띠는 문화재를 선정,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며 그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세계유산은 미래 세대에 전달할 만한 인류 보편적 가치가 있는 자연이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유산이다. 세계유산에 등재된다는 것은 인류가 공동으로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유산임을 증명받는 것으로, 국제적 지명도에 따른 관광객 증가와 정부의 지원 등을 받을 수 있어 지역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유산의 가치를 재인식함으로써 훼손을 막아 원상태의 보존이 가능하다.
이에 경기도, 고양시, 경기문화재단은 지난 2013년부터 ‘북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문화재청의 고양시, 서울시 세계유산 공동 추진 권고를 받아들인 결과 북한산성·탕춘대성·한양도성이 ‘조선의 수도성곽과 방어산성’이라는 명칭으로 묶여 세계유산 우선 등재목록에 선정됐다. 이들 3개의 문화재는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한반도에서 수도방어시설의 유형과 축성기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경기도, 서울시, 고양시, 경기문화재단 등으로 구성된 세계유산 등재추진단은 국외 심사 절차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예비평가를 준비하고 있으며, 내년 10월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온다면 2027년 세계유산 등재로 가는 문턱에 한걸음 더 가까워진다.
정전 이후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전하고 있는 ‘DMZ’ 역시 2028년을 목표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DMZ는 6·25전쟁이 한반도를 휩쓸고 가면서 남긴 상흔으로, 전쟁과 분단의 상징이다. 풀 한 포기 날 것 같지 않았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자 역설적으로 수많은 생명을 품은 동식물의 낙원이 됐다.
경기도, 경기문화재단은 DMZ를 국제평화공간으로 조성하고 지속가능한 보전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을 준비 중이다.
또 지난달 27일 정전협정 70주년을 기념해 파주 임진각에서 국내외 예술인들이 모여 ‘2023 세계예술인 한반도 평화선언’을 개최했다. 2020년부터 2년간 진행된 ‘한반도 DMZ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정전협정 70주년의 의미와 DMZ 세계유산 등재 필요성 등에 대해 심층 토론도 펼쳐졌다.
이와 함께 수원화성, 융·건릉, 만석거 등 10곳을 아우르는 ‘정조대왕 신도시 건설 유적군’과 태아의 생명력이 부여된 태를 중시해 한국의 생명존중문화를 보여주는 ‘태봉태실’도 연구용역을 통한 세계유산 등재의 시작 단계에 들어섰다.
인터뷰 이지훈 경기문화재연구원장 “문화유산 발굴… 공공의 가치 확대할 것”
“우리가 모르는 채로 놓여 있는 경기도의 문화유산을 발굴해 ‘공공의 가치’를 심는 노력을 확대해 가겠습니다.”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은 경기도의 문화유산을 찾아 더욱 가치있게 다듬어 미래 세대에 전하는 곳이다. 연구원은 문화유산 조사·연구, 보존, 관리 등을 하며 경기도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밝히고 있다.
특히 도로 건설 등 개발에 앞서 문화유산 구제 발굴조사를 하거나, 역사 속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학술발굴 조사 사업을 하고 있다. 또 문화유산의 원형과 가치를 지키는 보존관리 사업은 연구원이 도내에서 유일하게 추진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이지훈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은 경기도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문화유산을 찾아 정체성과 연결시키는 것이 연구원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이 원장은 “경기도에서 실학이 융성했던 이유는 보수적인 서울의 틀을 벗어나 실학자들이 경기도에서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학자들이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했던 것이 결국 지금의 경기도 정체성과 연결된다”고 말했다.
이어 “경기도는 문화의 집합체이자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장소였고, 이 같은 성격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며 “경기도의 역사성과 고유성을 띠는 문화유산 발굴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 원장은 연구원이 경기도의 유형문화재를 주 대상으로 했던 기존의 역할을 확대해 역사 등 광의의 문화유산을 관리하고 가치를 높이는 작업을 해 나가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이 원장은 “경기도의 문화유산 관련 사업이 유형의 문화유산만 관리하는 수준이고, 관련 축제 등 사업들이 일회성으로 끝나 효율적으로 추진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지역학, 도사편찬 등의 사업을 통합 관리하는 등 연구원의 역할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연구원이 광역의 역할을 잘해 나가는 방안을 고심 중”이라며 “경기도, 연구원, 31개 시·군, 문화원 등의 역할을 고루 분배해 연구원은 지역이 사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게 도와주고, 광역 중심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아카이브 센터 역할 등을 하는 방안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세계유산 등재에도 심혈을 기울여 경기도 문화유산이 세계유산이자, 세계유산이 곧 경기도의 문화유산임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김보람 기자 kbr13@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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