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아버지? 수소폭탄 반대자?…'파괴자' 된 오펜하이머

차유채 기자 2023. 8. 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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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후]
[편집자주] 뉴스와 이슈 속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뉴스와 이슈를 짚어봅니다.

맨해튼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우측) /사진=홈페이지 thoughtco 캡처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됐다. 전례 없는 강력한 공격에 일본 전체가 혼돈에 빠진 상황에서 사흘 뒤인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이 투하됐다.

일본은 당초 연합국 측의 종전 요구를 묵살하고 있었으나, 원폭의 압도적인 공포를 겪고는 15일 정오 옥음방송(玉音放送)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에 투하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이른바 '맨해튼 계획'을 주도한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러나 모순적으로 그는 '수소폭탄 개발의 반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본인이 우려한 대로 '세상의 파괴자'가 되고 말았다.

천재 교수, 좌파 사상에 경도되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사진=홈페이지 theconversation 캡처

1904년 4월 22일 미국 뉴욕의 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어린시절 운동신경이 둔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14살 때 여름 캠프에서는 고자질했다는 친구들의 오해로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갇혀서 하루밤을 지새우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빠르고 탁월한 학습 능력을 바탕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벤디시 연구소(물리학 연구소)로 유학 갔다가 독일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 이론 물리학, 그중에서도 스펙트럼 양자론을 공부해 명성을 쌓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UC 버클리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교수로 맹활약했다. 많은 학생이 오펜하이머의 수업을 듣고자 했기에 그는 세 번 이상 자신의 과목을 들으려는 학생들에게 퇴짜를 놓아야 할 정도였다.

오펜하이머는 대공황 시절 좌파 사상에 경도되기도 했다. 당초 그는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정치가 진, 선, 미 중 어느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냐"고 물을 정도로 정치에 무지했으나, 자신의 은사 막스 보른이 추방당하면서 노조운동 특히 교직원 노동조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로 열정적인 좌파 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의 행보는 훗날 그가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받는 근거가 되고 말았다.

"대량살상무기, 전쟁 억제력 가질 것" 맨해튼 계획 지휘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좌측) /사진=홈페이지 thoughtco 캡처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 미국이 주도한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게 됐다.

맨해튼 계획에는 오펜하이머를 비롯해 닐스 보어, 존 폰 노이만 등 당대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차출됐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맨해튼 계획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권위를 빌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1939년 시작된 맨해튼 계획에는 13만명의 인력과 당시 돈으로 20억달러가 투자됐다. 이는 2023년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330억달러(43조4973억원)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미국은 '나치 독일로부터 미국과 유럽을 지키기 위해'라는 목적으로 맨해튼 계획을 진행했다.

오펜하이머 역시 "원자폭탄의 개발은 전쟁을 막을 것"이라며 "강력한 대량살상무기의 등장은 전쟁 억제력을 가질 것이기에 (원자폭탄은) 오히려 전쟁을 막을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수소폭탄 개발 반대론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사진=홈페이지 menshealth 캡처

오펜하이머는 핵폭탄 개발의 이론·기술 분야 전반에서 과학자들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원폭이 투하된 후에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직을 사퇴하고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훗날 그는 당시 결정에 대해 "현재로서의 나는 더 나은 길이 열렸는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폭탄을 만들고 테스트를 한 것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사용한 방식에 대해서는 제대로 사용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오펜하이머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미국 정부가 추진하던 수소폭탄 계획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표했고, 앞선 행보와 맞물려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됐다. 그가 한때 좌파 사상에 경도된 점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1950년대 미국에는 매카시즘 바람이 불었다. 사회 전반에서 반공주의가 강하게 일어났고,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던 오펜하이머 역시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1953년 12월 모욕적인 청문회 끝에 비밀정보접근 권한을 빼앗겼다.

촉망받는 과학자였고, 한때 미국의 중심에서 기술 개발을 주도했던 오펜하이머는 1965년 식도암 진단을 받았고, 1967년 2월 사망했다. 향년 63세.

사망 55년 만에 '소련 스파이' 무혐의…영화로 재조명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사진=아이맥스 제공

오펜하이머는 세상을 떠난 지 55년 만인 2022년에야 '소련 스파이' 의혹을 벗었다.

지난해 12월 제니퍼 그랜홈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성명을 통해 오펜하이머에 대해 기밀 접근을 차단했던 것이 "결함이 있는 절차였다"며 "오펜하이머에 대한 결정에 편견과 불공정이 적용됐단 증거가 드러나고 있지만, 국가를 향한 그의 충성심과 사랑에 관한 증거는 향후에도 확인될 것"이라고 밝혔다.

영화 '다크나이트' 시리즈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15일 개봉하는 영화 '오펜하이머'를 통해 오펜하이머의 삶을 재조명했다.

지난달 21일(현지 시간) 미국에서 먼저 개봉한 '오펜하이머'는 오프닝에서 8200만달러(약 1071억원)의 수입을 거뒀다. 이는 '다크나이트 라이즈', '다크나이트'에 이어 놀란 감독이 만든 영화 중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차유채 기자 jejuflow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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