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장과 재판정 뒤엉킬 2024 미 대선…민주주의 또 시험대로

이본영 2023. 8. 1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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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3일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의 자기 소유 골프장에서 열린 프로골프 경기 도중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고 쓴 모자에 사인을 해 관중에게 던져주고 있다. 베드민스터/AP 연합뉴스

“솔직히, 이번 선거는 우리가 이긴 거다.”

전날 치러진 미국 대선 개표가 진행되던 2020년 11월4일 새벽,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백악관 이스트룸에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건 미국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이라며 개표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승자는 가려지지 않았으나 트럼프가 승리를 주장하던 여러 경합주가 조 바이든 후보에게 넘어가던 상황이었다.

이때만 해도 트럼프의 근거 없는 주장의 파장이 다음 대선까지 이어져 미국 민주주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리라고 내다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는 지금 공화당 경선 주자 중 본선 진출 확률이 가장 높아 보인다. 게다가 대선 결과 번복 시도 등에 대한 재판이 대선 일정과 맞물리고 있다. 트럼프로서는 권력을 탈환하지 못하면 여생을 감옥에서 보낼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이와 맞물려 2024년 대선은 미국 민주주의에 중대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 트럼프 재판과 엉킨 대선 캘린더

트럼프는 3월 말 이래 성관계 입막음 돈과 관련된 회계 조작, 기밀 반출, 대선 결과 번복 음모 혐의로 잇따라 기소됐다.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 검찰도 투표 결과 조작 압박을 놓고 곧 그를 기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헌법에는 기소나 유죄 선고를 이유로 대선 출마를 금지하는 규정이 없다. 실형 선고로 투옥되더라도 후보 자격을 잃지 않는다. 재집권할 경우 그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피고인 출신’ 대통령이 된다.

이 상태에서 대선과 재판 일정도 맞물리고 있다. 내년 3월25일에 뉴욕 맨해튼 검찰이 기소한 회계 조작 사건 재판이 열린다. 잭 스미스 특별검사가 플로리다주 연방법원에 기소한 기밀 유출 사건 재판 날짜는 5월20일로 잡혔다. ‘1·6 의사당 난동 사태’ 등을 둘러싼 대선 결과 번복 음모 사건 재판 일정은 미정이지만 스미스 특검은 신속히 진행하자는 입장이다.

이런 재판 일정들 사이에 공화당 경선 일정이 끼여 있다. 1월15일에는 첫 경선인 아이오와주 코커스(당원대회)가 열린다. 하필 이날 트럼프한테 성폭력을 당했다며 소송을 걸어 배상 판결을 받은 여성 작가가 그를 상대로 청구한 추가 손해배상 재판도 잡혀 있다. 여러 주에서 경선이 진행돼 사실상 승부가 결정될 수 있는 ‘슈퍼 화요일’은 3월5일이다. 7월15일에는 대선 후보를 공식 지명하는 전당대회가 열린다.

선거운동을 위해 넓은 미국 땅을 누벼야 하는 트럼프로서는 며칠씩 이어지는 재판과 그 준비에 시간과 에너지를 뺏기는 것은 손해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대선 전에 유죄가 선고돼 승패에 영향을 미치거나 투옥될 가능성이다. 트럼프는 형사사건 재판을 내년 11월5일 대선 뒤로 미루려고 지연 전략을 펴지만 아직 법원이 호응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일정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년 대선은 정치와 사법이 뒤섞이는 국면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이런 상황에 대해 “트럼프는 유권자들을 궁극적인 배심원단으로 만들려고 한다”며 “유권자 수천만명이 최종 평결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 트럼프가 이기든 지든 혼란

이는 한건이라도 유죄 판단이 나오면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는 트럼프에게는 선거운동이 자기 구명 운동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트럼프 선거캠프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그의 법률 비용으로 쓰고 있다. “난 절대로 감옥에 안 간다”고 공언하는 트럼프는 “그들은 내가 아니라 여러분을 처벌하려는 것”이라며 자신과 지지자들의 운명을 일치시키려고 한다.

트럼프의 전략이 먹혀 대선에서 이긴다면 처벌은 불가능해진다. 그의 수중에 들어갈 법무부가 공소를 취소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 법무부는 현직 대통령은 소추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스스로를 사면할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중죄를 거듭 저지른 사람이 헌법 수호의 책임자 자리에 앉아 스스로는 죄를 면하는 큰 부조리가 발생한다.

‘대통령 트럼프’가 미국 민주주의에 끼칠 해악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많다. 첫 임기 때는 통치 경험과 기술이 백지상태였던 트럼프는 재집권하면 ‘미완의 개혁’을 이루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는 대통령 직할이 아닌 기관들을 직접 지휘하고 의회의 예산 배분권을 줄이겠다는 등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강력한 정치 보복도 예고했다. 지난 3월 공화당 행사 연설에서 “난 여러분의 전사다. 난 여러분의 대법관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배신당한 이들을 위해 내가 응징하겠다”고 했다. 시위 진압에 군을 동원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다며 “굉장하다”고 했던 트럼프가 독재자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가 낙선해도 다른 차원의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높다. 그가 700만표 이상 뒤진 2020년 대선 결과에 불복하면서 미국이 얼마나 위험한 지경까지 갔는지는 이달 1일 법원에 제출된 대선 결과 번복 음모 사건 공소장으로도 확인된다. 공소장에 ‘공모자 4’로 묘사된 제프리 클라크 당시 법무부 차관보는 트럼프가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모든 대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백악관 소속 변호사의 경고에 “그래서 소요진압법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사기와 부정으로 대선 결과를 뒤집고, 반발이 커지면 군을 동원해 진압하겠다는 말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트럼프의 부정선거 주장을 지지하는 미국인이 아직도 30%에 이른다는 것이다. 지난 5월 몬머스대 여론조사에서는 공화당원들의 68%가 바이든 대통령이 선거 사기로 집권했다고 응답했다. 시카고대 등의 연구자들이 참여한 ‘브라이트 라인 워치’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원의 60%가량은 대선 선거인단 투표 인증을 막으려는 과정에서 5명이 사망한 ‘1·6 의사당 난동’이 합법적 시위였다고 답했다. 트럼프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징역 561년에 처해질 수 있다며 대선과 재판을 결부시키고 있다.

■ 가짜뉴스·AI·러시아…

트럼프는 가짜뉴스나 음모론과 함께 성장한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거짓, 유리한 것만 진실이라는 그의 태도는 지지자들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트럼피즘’은 가짜뉴스 제작과 유통을 일부의 은밀한 일탈 행위가 아니라 미국 정치의 주류적 현상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내년 미국 대선에서는 인공지능(AI)이 만드는 가짜뉴스가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을 이용해 미국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해온 러시아 등에는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무기까지 쥐어졌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국의 강력한 견제를 받는 러시아는 더 적극적으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고 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티머시 호그 미국 국가안보국(NSA) 국장 겸 사이버사령관 지명자는 지난달 말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생성형 인공지능이 대선 때 어떤 역할을 할지를 주목해야 한다며 “외국에서 우리 선거 절차와 관련해 이를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미국 대선은 트럼프 기소, 트럼프-바이든 재대결 가능성, 인공지능과 가짜뉴스,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요소가 뒤섞이면서 평화적 방식의 권력 창출이라는 의도와 달리 정치·사회적 갈등을 급격히 고조시킬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지난 6월 에이피(AP) 통신과 시카고대 여론연구소 공동조사에서 44%만이 내년 대선 개표가 아주 정확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답한 것은 많은 미국인이 이미 결과에 대한 불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해석을 낳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런 상황에 대해 “많은 공화당원은 트럼프가 바이든을 이기고도 다음 선거를 또 도둑맞을 것이라고 믿고, 민주당원들은 공화당이 선거 결과를 다시 뒤집으려고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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