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12년 묶인 약 자판기, 싱가포르는 5년만에 풀었다
지난 9일 오후 싱가포르기술디자인대학(SUTD)의 야외 학생 쉼터. 이곳엔 싱가포르 최초 원격진료소 겸 약 자판기가 설치돼 있다. 지난 3월 설치된 기기로 약 3.3㎡(1평) 크기 진료소에 들어서자 키와 몸무게, 체온, 심박수, 혈중산소포화도, 혈압 등을 측정하는 의료기기가 놓여 있었다. 환자는 이 기기와 연동된 스마트폰 앱을 실행해 의사와 화상 통화를 하면서 실시간 진료를 받고, 진료가 끝나면 앱으로 약 처방 코드가 발송된다. 진료소 바로 옆에 놓인 약 자판기에 이 코드를 입력하면 전문 의약품까지 포함된 약이 자동으로 조제되고, 약 사용 지침까지 적혀 나온다. 진료를 받고 약을 받기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원격진료소 겸 약 자판기는 2019년 초 싱가포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스타트업 스마트알엑스가 개발해 운영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2016년 약 자판기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정부가 주도적으로 관련 스타트업과 병원들의 원격진료, 약 자판기 사업을 지원했다. 올해 초엔 약 자판기 판매 약품을 일반 의약품뿐 아니라 의사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 의약품까지 확대했다. 스마트알엑스는 현재 운영 중인 약 자판기 5대를 올해 내 50대로 확대할 계획이다.
약 자판기 기술 개발과 아이디어는 한국에서 12년 전 나왔다. 한국의 스타트업 쓰리알코리아는 2011년 약 자판기 특허출원과 제품 개발에 성공하고, 2013년 인천에 2대를 설치했지만 약사들의 반발로 설치 2개월 만에 자판기를 철거했다. 이후 2019년 정부에서 임시 사업권을 얻을 수 있는 규제 샌드박스 제도에 신청했지만 2022년에야 허가를 받고 수도권에 7대를 제한적으로 설치하는 데 그치고 있다.
◇비대면 진료도 싱가포르 5년 만에 완전 합법, 한국은 석 달 새 7곳이 접어
한국이 개발 후 12년 만에야 시범 사업에 나선 약 자판기가 싱가포르에선 5년 만에 완전 합법화된 것처럼, 국내 의료 혁신은 규제에 발이 묶여 있다. 대표적인 것이 비대면 진료다. 다음 달부터는 최근 대면 진료를 받은 병원에 한해 비대면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또 비대면 진료를 받더라도 기존처럼 약 배달을 받을 수 없고 약국을 방문해야 한다. 국내 비대면 진료 앱을 운영하는 A 업체 대표는 “기존 이용자 99.3%는 비대면 진료를 받을 때 한 번도 대면 진료를 받은 적 없는 병원을 선택했는데, 다음 달부터는 비대면 진료의 이점이 사라지는 셈”이라며 “이용자 급감이 예상돼 비대면 진료 앱 운영을 접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2017년 6개 업체에 대한 비대면 진료 시범 사업을 시작했고, 이듬해 곧장 이를 합법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020년 1월 의회 통과 후 작년 6월 비대면 진료 시행까지 약 5년이 걸린 셈이다. 반면 한국은 최근 석 달 새 비대면 진료 업체 7곳이 관련 서비스를 접었다. 원격의료산업협의회 관계자는 “비대면 진료 이용자가 5월엔 하루 평균 5000명에 달했는데, 지난 두 달 사이 이용자가 26.1% 감소했다”고 말했다.
◇”규제 샌드박스는 희망 고문일 뿐”
낡은 규제에 막혀 신기술을 이용한 혁신 비즈니스가 시장에 도전조차 못 하는 일을 막기 위해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를 운영하고 있다. 규제 샌드박스는 새로운 사업이 현행 규제에 막힐 경우, 한시적으로 규제를 유예하고 최대 4년 임시 허가를 내주고 시장 검증 기회를 주는 제도다. 하지만 기업들 사이에선 규제 샌드박스가 ‘희망 고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19년 도입 이후 현재까지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임시 사업 허가를 받은 기업은 약 945곳에 달한다. 이 기업 중 지난해 기준 입법 혹은 유권해석 등을 통해 규제가 완전히 해소된 기업은 132곳에 그친다. 2019년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특례를 받은 기업 195곳도 올해 특례 기간(최장 4년)이 만료된다. 특례 기간 일부 업체는 규제가 풀렸지만 대부분 업체의 경우, 규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렇게 규제 해소 속도가 느리다 보니 2022년 기준 해외 100대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이 한국 사업을 할 경우(아산나눔재단 조사), 12곳은 아예 한국에서 사업이 불가능하고, 43곳은 제한적으로만 가능하다.
투자자들은 ‘규제 때문에 사업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혁신 기업들에 대한 투자를 꺼린다. 박인술 쓰리알코리아 대표는 “투자자들은 ‘언제 규제로 사업 자체가 불가능해질지 모른다’고 투자를 보류한다”며 “약 자판기 고작 7대로는 운영비도 못 건지는 적자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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