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부정부페’의 맛
‘부패 맛집’ 돼가는 대한민국
대법원 앞 식당의 언어유희
쉬이 웃어넘기기 힘든 까닭
허기진데 돈은 궁할 때 ‘부정부페’가 가까이 있다.
서초동에는 대법원과 대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 등이 모여있다. 욕망에 쉬이 굴복한 자들이 종국에 이곳으로 와 고개를 숙이곤 한다. 인근에 의미심장한 식당이 하나 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법조타운 코앞에서 영업하는 밥집치곤 요상한 상호 아닌가. 필시 ‘부정부패’를 겨냥했을 것이다. 법조인들 사이에선 유명한 맛집이라 한다. 점심엔 반찬만 일고여덟이고 무한리필까지 된다. 9000원. 지갑 얇을 때 이만한 곳이 없다고.
30평 남짓한 이곳의 규칙은 하나다. ‘맘껏 드시되 남기지 말아주세요.’ 벽면에 헌법처럼 쓰여있다. 몰래 싸가거나 남겨먹으려할 때 부패가 시작될 것이다. 서초동에 개업한 변호사 친구와 마주 앉아 밥을 퍼먹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근처 직장인으로 보이는 식객들이 일사불란하게 둥근 쟁반에 반찬을 담고 있었다. 여기 음식은 결코 산해진미가 아니지만, 집게로 너무 많이 집었다 싶으면 조금 덜어내는 신중함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문득 자신의 정량을 알고 퍼담는 이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생각했다.
토종닭 전문점 ‘난 공산닭이 싫어요’라든가, 중독성 강한 막창구이집 ‘막창 드라마’, 탐스런 오리고기 육질을 피력하는 ‘탐관오리’ 같은 간판을 보고 낄낄댄 적이 있다. 한국식 빨간 맛을 보여주는 언어유희 아닌가. 그러나 ‘부정부페’에는 그 장소성으로 인해 가벼이 웃어넘길 수 없는 비애(悲哀)가 추가된다. ‘부정부페’가 입주한 4층짜리 건물에는 은행과 회계사·세무사 사무실이 있다. 며칠 전 시중 은행에서 거액의 횡령 사건이 터졌고, 공공아파트 기둥에서는 철근이 누락됐다. 역대 최악의 ‘잼버리’ 사태는 고강도 감사를 앞두고 있다.
‘부페’는 뷔페(buffet)의 잘못된 발음이지만, 그 잘못으로 인해 더 쉽게 부패를 상기시킨다. 부패의 ‘부’(腐)는 지방 관청을 의미하는 ‘부’(府)에 고기 ‘육’(肉)을 위아래로 합친 것이다. 거기서 고깃덩이가 썩고 있다. 부페가 여럿이서 조금씩 퍼담는 시스템이라면, 부패는 소수가 다수를 독식하려할 때 벌어진다. 부페는 음식을 일렬로 개방한다. 부패는 밀폐된 곳에서 발생한다. ‘부정부페’를 다녀간 한 블로거가 “△△△도 울고 갈 정치인들의 공식 맛집”이라는 리뷰를 남겨놨다. 그러나 지금 부패는 한 사람으로 특정할 수 없는 너무도 방대한 악취를 풍기고 있다.
부페의 핵심은 가성비다. 부패도 마찬가지다. 절차와 양심의 수고를 건너뛰니까. 범법(犯法)만큼 가성비 좋은 활동은 없을 것이다. ‘부정부페’는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안나’ 촬영지로도 잠깐 등장한다. 거짓과 파국에 대한 이야기다. 2화에서 가난한 사법고시 준비생이 “이 동네에서 가성비로는 여기가 최고”라며 역시 가난한 여주인공을 데리고 자리에 앉는다. 곧 본색을 드러낸다. “나랑 만나보는 게 어떠냐”며 여자의 무릎을 만진다. 여자는 일어나 밥그릇을 던져버린다. “너같은 새끼가 법조인이 된다고?”
‘부정부페’를 빠져나와 10분 정도 걸으면 예술의전당이 나온다. 오스트리아 출신 비평가 에른스트 피셔는 “부패한 사회에서 예술은 부패를 반영해야한다”고 했다. 그 예술은 부패의 극복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영을 넘어 부패 자체가 된 자들이 결코 적지 않다. 철학 서적에서 빌려온 얄팍한 포장지로 구린 재료를 위장하는 자들. 인본주의를 내세우지만 타인의 착취에 관대하며, 가난을 예찬하지만 입신의 기회 앞에서 누구보다 잔인했던 이른바 민중의 거장들. 일부는 감옥에 갔고 또 한 명의 철창행이 예고돼있다.
배는 고프고 사정은 팍팍할 때, 부정부패는 우리 가까이 있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부정부페’로 가는 것이 옳다. 참고로 이곳의 ‘부정’은 부정(父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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