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오 사설] 윤석열 정부에 법치주의를 묻는다
미디어오늘 1414호 사설
[미디어오늘 미디어오늘]
1985년 8월7일 영국에서 모든 방송 뉴스가 블랙아웃이 됐다. 전 세계 시청자를 가진 BBC뿐 아니라 독립방송기구(IBA) 소속 지역방송 매체와 라디오 뉴스 전부 중단됐다. 검정색 화면엔 노란 활자의 문구가 떴다. 전국의 신문과 방송 조합에 속한 회원의 파업으로 인해 예정된 프로그램을 보내드릴 수 없어 사과드린다는 메시지였다.
당시 영국 미디어 종사자들 파업은 BBC 보도 독립성이 침해당한 일에서 비롯됐다. BBC TV는 북아일랜드 지역 분쟁을 다루는 45분짜리 다큐멘터리 방영을 앞두고 있었다. 방송 내용 중 아일랜드 공화군 간부의 인터뷰가 문제가 됐다. BBC는 갈등 당사자 인터뷰 통해 분쟁의 배경을 다루려고 했지만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공화군의 테러를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고 반발했다. 이에 레온 브리튼 내무장관은 BBC 이사장에게 해당 프로그램 방영을 우회적으로 하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BBC 이사회는 회의를 열어 내무부장관 요청을 수용했다.
하지만 BBC 운영위원회는 이사회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을 냈고, 이에 동조한 기자 노조 등이 파업에 돌입했다. BBC 이사회를 운영위원회가 견제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기에 가능했다. BBC 이사회는 방송 운영과 편성, 사업 정책 등을 관리 감독하지만 실질적인 집행 책임자는 총국장이다. 총국장 산하엔 각 분야별 운영위원회가 있다. 다큐멘터리 방송 내용에 대한 편집은 전적으로 총국장의 권한에 속하는데 정부 고위 관료가 방송 내용을 사전 심사한 것은 편집권 침해에 해당된다는 것이 운영위원회 의견이었고 이사회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정한 것이다.(참고-박권상 언론학_공영방송의 모범생 BBC)
결국 내무부장관은 “검열은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24시간 파업은 마무리됐다. 영국 BBC 사례의 교훈은 방송의 관리 감독 권한이 있는 이사회가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한을 행사할지라도 BBC 구성원의 뜻에 반하고 특히 그 뜻이 방송 독립성에 관한 것이라면 그 결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데 있다.
한국의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있는 법마저도 지키지 않는다. 방송장악 논란의 장본인인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는 법 해석에 따라 자격 시비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설치법 10조(결격사유) 1항 6호에 따르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의 신분을 상실한 날로부터 3년이 지나지 아니한 사람”에 대해선 위원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동관 후보자는 불과 1년 전 인수위 활동을 한 사람이다. 인수위 '고문'이었기 때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해당 조항은 방송통신 정책 수립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배제해야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인수위 활동이 방통위 독립성을 침해할 수 있으니 그 활동을 한 사람을 배제하라고 했는데 버젓이 그 사람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낸 것이다.
KBS와 MBC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에 대한 해임도 법률을 위반하거나 절차를 건너뛰고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를 하고 있다. 한달 전 일사천리로 해임 처리된 윤석년 KBS 이사의 경우부터 잘못 꼬였다. 방통위는 윤 이사가 TV조선 재승인 심사 점수 조작 의혹 혐의로 구속기소된 것에 대해 국민 신뢰를 저하시켰다고 해임 사유를 밝혔는데 방송법은 방통위의 권한으로 KBS 이사 추천을 규정하고 있지만 해임 규정은 나오지 않는다. 이사 결격사유 규정으로 보면 국가공무원법상 결격 사유, 즉 금고 이상 형 집행유예를 받거나 형이 확정된 경우이지만 윤 이사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권태선 MBC 방문진 이사장 역시 여러 해임 사유를 들고 있는데 방통위의 방문진 감사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방통위가 방문진을 감사할 수 있다는 권한도 있기 어렵다는 유권해석이 나온 바 있다.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는 법치주의는 무기로 휘둘렸을 때만 한정된다. 최근 이동관 후보자가 YTN 방송사고에 대응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흉기난동범이 유가족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는 리포트 배경화면에 이동관 후보자를 내보낸 건 분명 잘못이다. 그런데 이 후보자는 실수가 아닌 고의이며 흠집내기성 보도의 연장이라고 주장하면서 민형사상 고소 고발을 예고했다.
YTN이 고의로 생방송 방송사고를 일으켜 얻을 게 뭐가 있나. 이동관 후보자가 방송사고를 빌미로 YTN를 길들이려고 하는 목적이 뻔히 보인다. 앞으로 YTN의 공적 검증 보도까지도 방송사고를 일으킨 불순한 의도의 횡포로 규정하고 YTN를 악마화하려는 프레임의 기술을 건 것이다. '역대급 방송사고'라고 YTN를 몰아세웠지만 그 주장은 이동관 후보자에 '역대급 방송장악 기술자'라는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방송 독립성 훼손 문제 그리고 법과 원칙 문제는 이동관 방통위원장 후보자를 끝까지 따라다니는 족쇄가 될 것이다. 언론을 찍어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역대급 방통위원장'이 치러야 할 대가는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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