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만명이 방문해 65만가지 추억 만든 곳…어쩌면 세상서 가장 느린 엽서가 있는 곳

강찬미 여행플러스 인턴기자(aboutsky12@naver.com) 2023. 8. 14.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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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쉽지 않다. 일상이 팍팍하다.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스트레스를 해소해 줄 자극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짧은 시간을 투자하고 큰 재미를 얻고 싶어 한다. 길이가 1분 남짓인 유튜브 숏츠가 인기를 끄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재미만을 추구하고 영상 하나가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다음 영상을 재생하다 보니 방금 본 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는 모습/사진=언스플래쉬
그래서 기자는 두렵다. 스크롤을 살짝 내려 봐도 사진은 별로 없고 검은색 글씨가 가득한 이 글을 보고 당신이 뒤로 가기를 눌러버릴까 봐서다. 이렇다 할 사진도 없이 앞으로 4245자의 글을 읽어야 한다면 다들 도망가지 않을까 싶은 걱정도 앞선다.
엽서를 담은 봉투/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엄청난 재미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당한 재미에 의미를 더한 서울의 이색 명소를 다녀와 꼭 함께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당신은 그곳에서의 경험을 곱씹고 또 곱씹게 될테고, 1년 뒤에 엽서를 보며 다시 한 번 당신이 했던 경험을 음미하게 될 것이다.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의 소중함과 나 자신 그리고 주변 사람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서울의 이색 명소 2곳을 소개한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어둠속의 대화 북촌점
어둠속의 대화 전시장 외관/사진=강찬미 여행+기자
인턴기자 생활 시작한 지 8개월만에 최대 난제를 만났다. 취재를 갔는데 보고 들은 내용을 거의 쓸 수가 없다. 심지어 건물 외관 사진 말고는 별다른 사진도 없다.

특출난 글재주도 없는데 무슨 수로 사진도 없고 전시 내용도 없는 글을 읽게 한단 말인가. 글 쓰는 일을 하는 기자도 글자가 너무 많아 보이면 창을 닫아 버릴 때가 있는데 사람들이 과연 끝까지 읽어줄지 심히 염려스럽다.

어둠속의 대화 전시장 외관/사진=강찬미 여행+기자
1시간 40분 동안 어둠 속에서 뜻깊은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아무리 외쳐 봐도 그냥 광고 정도로 치부하진 않을까, 입장권이 3만3000원으로 그리 저렴하지도 않은데 무슨 내용인지는 말도 안 해주면서 푯값이 절대 아깝지 않으니 가라고만 하면 과연 믿어줄까 걱정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일어났을 때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앞에 하얘지는 경험을 한 번씩은 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태가 몇 초 정도가 아니라 계속된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지속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둠속의 대화 전시장 점자 안내판/사진=전혜을 영상PD
지금 이 기사를 눈으로 읽고 있다면 당신에 대해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다. 당신은 앞이 보인다. 보는 데 별문제가 없는 삶을 살아왔다면 어둠속의 대화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 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둠속의 대화 전시 안내판/사진=전혜을 영상PD
‘어둠속의 대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는 이색 전시다. 100분 동안 안내자인 로드마스터를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어둠속의 대화’는 1988년 독일에서 처음 시작해 지금은 전 세계 32개국에 전시장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0년에 상설 전시장을 설치한 이후 65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어둠속의 대화’를 경험했다.

인터뷰 중인 송영희 어둠속의 대화 대표이사/사진=전혜을 영상PD
눈을 뜨나 감으나 컴컴한 어둠만이 계속되는 공간에서 로드마스터의 목소리에 의지해 한 손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은 벽을 짚고 걸어가면서 이동한다.

​어둠 속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싶지만 1시간 40분 동안 굉장히 많은 것을 체험한다. 전시에 참여하며 내가 눈으로 본 건 어둠뿐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어둠이 가릴 수 없는 무언가를 보았다. 내가 만지고 밟는 모든 것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뼈대를 세우고 색을 입혔다.

점자가 있는 송영희 대표의 명함/사진=전혜을 영상PD
전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선 그곳이 검은색이 아니라 총천연색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기에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형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이곳을 500명이 방문하면 500명이 기억하는 이미지가 다 다르다. 어둠속의 대화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하루에도 수백 번씩 그 모습이 바뀐다.

어둠속의 대화 방명록 쓰는 곳/사진=강찬미 여행+기자
체험을 마치면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정말 아는 것인지 묻게 된다.

보인다는 걸 가정하고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 일상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게 된다. 체험 후에 경험한 걸 되돌아보는 시간이 꼭 필요한 전시다.

어둠속의 대화 방명록 화면/사진=강찬미 여행+기자
10번 넘게, 100번 넘게 오는 관람객도 있을 만큼 분명 재미도 갖춘 전시다. 하지만 재미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 전시라고 말하고 싶다.

‘어둠=얻음’이라는 후기가 무척이나 기억에 남는다. 100분 동안 당신은 어둠 너머로 무엇을 보게 될까. 정말 궁금하다.

어둠속의 대화 외관에 난 작은 창
전시에 대한 정보는 이 기사 하나로 충분하다. 최대한 백지상태로 가자. 어둠속의 대화만큼은 어떤 전시인지 모르는 게 힘이다. 보이지 않아 더 조심하게 되니 안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엽서 한 장으로 미래를…널담은공간 경복궁점
널담은공간 입간판/사진=강찬미 여행+기자
‘어둠속의 대화’ 관람을 마치면 너나 할 것 없이 여러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널담은공간에서 느낀 점을 곱씹어 보며 미래의 나에게 또는 함께한 일행에게 또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보자. 모든 것이 디지털로 변하는 이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널담은공간 외관 전경/사진=wo_oro 인스타그램
편지 발송함/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널담은공간은 엽서를 쓰면 그다음 해에 발송해 주는 이색 카페다. 만약 엽서를 쓰는 연도가 2023년이라면 2024년 중 언제 받을지 선택할 수 있다. 편지 발송함이 365개라 받고 싶은 날짜에 엽서를 넣으면 된다. 어쩌면 세상서 가장 느린 엽서일 수 있겠다 싶다.
널담은공간 내부/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널담은공간 내부/(좌)=강찬미 여행+기자, (가운데,우)=널담은공간 제공
​소중한 사람에 대한 마음을 담는 공간이라고 해서 이름도 널담은공간이다.

말로는 못 해도 글로는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에, 또 편지를 지금이 아니라 내년에 받는다면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엽서 카페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사진=wo_oro 인스타그램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널담은공간은 경복궁 옆에 위치해 창 너머의 전경이 정말 아름답다. 통창이라 밖을 보며 엽서를 쓰다 보면 그 자체로 힐링이 된다.

화려한 한복을 차려입고 경복궁 근처를 누비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창밖 풍경에 활기를 더해준다.

더운 여름에 인기가 많은 비건 아이스크림 크러플/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비건 크림을 듬뿍 올린 크루아상/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널담은공간은 비건 카페다. 매장의 모든 음료와 디저트는 다 비건이다. 비건은 우유, 달걀 등 동물성 원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식품을 말한다.

비건이라고 해서 맛이 없을 거란 편견은 버리자. 비건인지 모르고 먹으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시중 음료나 디저트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자체 공장에서 제조해 판매하는 비건 식품/사진=강찬미 여행+기자
오히려 버터, 우유 등 유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이런 맛과 식감을 구현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비건 식품을 연구하고 생산하는 자체 연구실과 공장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비건유, 비건 버터 등 음료와 디저트를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부터 다 직접 생산한다고 한다.

색감이 오묘한 엘더플라워 에이드/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매장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메뉴를 주문했다. 시원한 여름에 딱인 엘더플라워 에이드는 레몬 베이스에 우린 꽃차를 넣은 음료다. 색이 정말 오묘하다.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색감 때문에 마시기가 아까울 정도다.

층층마다 다른 색깔을 뽐내는 에이드를 잘 저은 후 한 모금 들이키니 레몬의 새콤함이 입안에 퍼진다.

기름기 없고 담백한 크루아상/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버터를 전혀 넣지 않은 크루아상도 맛봤다. 칼로 자르는데 ‘바사삭’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난다. 기름기가 쫙 빠진 담백한 크루아상에 비건 크림을 찍어먹으니 꿀맛이 따로 없다. 먹고 있으면서도 이게 정말 비건 디저트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왼쪽부터)흑임자, 땅콩, 말차, 모카 비건크림과 크루아상/사진=강찬미 여행+기자
여러 가지 크림을 다 먹어보고 싶어서 조금씩 달라고 부탁했는데 맛이 정말 진하고 풍부했다. 흑임자·말차·땅콩·모카 등 크림 종류도 다양하다.
엽서 쓰기 위한 준비물/사진=강찬미 여행+기자
좌=엽서 쓸 때 쓰는 널담은공간 볼펜,우=엽서를 쓰면서 바라보는 풍경/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배를 채웠으니 본격적으로 엽서를 써 볼 차례다.

‘어둠속의 대화’에 참여하며 들었던 생각들 그리고 최근에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자 한 자에 꾹꾹 눌러 담는다. 내년 이맘쯤에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정말 궁금해진다.

실링왁스 만드는 곳/사진=강찬미 여행+기자
엽서를 다 썼으면 1층으로 내려가서 실링 왁스를 만들어 보자. 스티커나 풀칠대신 실링 왁스를 직접 만들어 봉투를 밀봉해 보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먼저 원하는 실링 왁스 색깔을 고른 뒤 테이블 위에 준비한 스푼에 실링 왁스 알갱이를 넣는다.

알갱이가 녹고 있는 모습/사진=강찬미 여행+기자
그 다음 켜져 있는 촛불 위에 스푼을 대고 알갱이가 다 녹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알갱이의 원래 형태를 못 알아볼 정도가 되면 봉투 접합면에 조심히 부어준다.

녹은 알갱이를 부은 봉투에 부은 모습/사진=강찬미 여행+기자
긴장되면서도 신나는 순간이다. 왁스가 굳을 때까지 5초 이상 기다렸다가 도장으로 꾹 눌러주면 완성이다. 널담은공간 마크가 선명히 찍힌 실링 왁스를 보니 괜스레 뿌듯하다.

도장 모양을 제대로 안 보고 찍으면 마크가 거꾸로 찍힐 수 있으니 잘 확인하자.

널담은공간 이용 안내판과 스티커/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발송함에 담긴 엽서들/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비치해둔 스티커로 봉투나 엽서를 꾸밀 수 있다. 원하는 대로 스티커를 붙인 뒤 엽서를 발송함에 넣어보자. 원하는 수령일로부터 3일 전의 날짜에 넣어주면 된다.
스티커로 엽서를 꾸민 모습/사진=강찬미 여행+기자
주소를 부정확하게 적어서 반송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하니 주소와 이름을 잘 확인해야 한다.

발송하지 못했거나 반송된 편지는 언제든지 와서 찾아갈 수 있도록 폐기하지 않고 다 보관한다고 한다.

엽서를 다 쓴 뒤 발송함에 넣은 모습/사진=강찬미 여행+기자
널담은공간은 현재를 1년 후에 추억할 수 있도록 365일 열려있다. 오늘의 마음과 생각을 엽서 한 장에 담고 싶다면 꼭 한 번 찾아가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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