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대신 어르신이 더 찾는 책방[책방지기의 서가]

2023. 8. 14. 21: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미화 지음, '달 밝은 밤'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우리 책방은 대전의 오래된 동네 골목길 끝 모퉁이에 있습니다. 오래된 동네, 골목길, 더구나 모퉁이라니 그림이 그려지시는지요. 여기에 더 환상적인 것은 우리 책방 골목을 돌면 유치원이 있고 골목길을 나와 길을 건너면 바로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그림책이 좋아 오랫동안 어른들과 그림책 모임을 하고 글을 쓰던 내가 지금은 이 골목길 모퉁이에 그림책방 문을 열고 아이들을 기다립니다. 내가 그림책방을 하게 된 것은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만반의 특히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이었고… 그러니 이제 아이들만 오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오래된 동네다 보니 유치원도 학교도 가까이 있지만 아이들은 잘 보이지 않고 어르신들이 더 많이 보입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책방 공사를 할 때부터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었는지 '어라! 카페를 상상했는데 책방'이란 표정으로 우리 책방을 기웃거리십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여기가 뭐 하는 데여?" 물으시고 책방이라고, 그림책방이라고 찬찬히 설명을 해도 다음에 또 묻습니다. "여기가 뭐 하는 데여?" 그림책방은 이렇게 어려운 곳입니다.

동네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학원버스를 타고 마을을 돌고 유치원 아이들은 노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곧장 갑니다. 책방 앞으로는 어르신들만 지나다니는데, 그것도 참 좋습니다.

그림책방이지만 우리 책방에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 많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에 비해 종류도 권수도 만만치 않죠. 그림책을 읽어주겠다면 도망가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그림책도 몇 권 있어요.

"아빠는 비틀거린다. 어제도 그랬다"로 시작하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아빠는 밥 대신 술을 먹는다. 술은 아빠를 웃게 만든다" 이렇게 이어지고요.

어제도 오늘도 밥 대신 술을 먹는 아버지, 엄마가 한숨을 쉴 때도 엄마 아빠가 싸우는 날이 계속되고 엄마가 집을 나갔을 때에도 주인공 아이는 달을 봅니다. 전미화의 그림책 '달 밝은 밤' 이야기입니다. 그다음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아도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야기. 우리 세대에겐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집 이야기고 우리 동네 이야기가 됩니다.

지금은 모두 시침 떼고 살고 있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분명 숨겨둔 그 아이가 살고 있습니다. 그림책은 분명 어린이를 향해 있지만 이렇게 한때 아이였던 나와 당신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싸우는 밤이면 나는 달을 본다. 달도 나를 본다."

하지만 주인공 아이는 나랑 달랐습니다. 이불 속으로 숨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밤이면 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달도 그 아이를 보았고 둘은 친구가 되었어요. 못 할 말이 없는 그런 친구 말이에요. 달과 친구가 되어 나눈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엄마를 데리러 오겠다는 아빠도, 너무 멀리 있는 엄마도 믿지 않고 마침내 "나는 나를 믿을 것이다"라고 선언을 합니다. 외로운 아이는 달과 친구가 되더니 나를 믿고 살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믿고 사는 것! 나는 아직도 어려운데 말이죠. 아이가 짠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우리 책방에 어른들 손님이 오면 나는 서슴없이 '달 밝은 밤'을 들고 와 읽어줍니다. 아주 천천히. 그럼 이 책이 아이들이 책이 맞냐고 묻지만 바로 조용해지고 그러고는 '나의 달 밝은 밤'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디서도 못 한 말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다들 기가 막힙니다. 왜 우린 이런 이야기를 못하고 살았을까?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려고 그림책을 읽다가 언제부턴가 나를 위해서 그림책을 읽습니다. 이제는 그림책방에서 어른들과 그림책을 읽으며 그때 하지 못한 말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난 오늘도 아이들이 학원 대신 책방에 오길 기다리며 어른들에게 '달 밝은 밤'을 읽어 주고 있지요. 그러면서 세상의 모든 달 밝은 밤 이야기를 모으는 중입니다. 마치 프레드릭처럼. 내가 그림책방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