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통일 없는 광복절
통일논의 없는 광복절이 되고 있는 분위기다. 지난해 광복절 당시 우리 정부의 담대한 구상 제안이 북한당국에 의해 무시당한 탓에 정부가 대북 정책이나 통일 논의를 제안하기도 쉽지 않아졌다. 그러다보니 더더욱 우리 국민의 통일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광복절 좌표의 표류를 북한의 반대로만 돌리기엔 상황이 녹록지 않다. 광복절 의미에 맞는 미래전략을 제시하기에 쉽지 않은 글로벌 난제들이 산재해 있고, 동시에 무한 갈등에 빠진 우리 안의 이분법을 다스릴 외교 언술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큰 난제는 글로벌 차원에서 제공되어 온 공공재가 급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글로벌 공공재의 가장 큰 수혜 국가였고, 그 사유화를 통해 성장 과실을 성취한 국가였다. 하지만 바이든 미국 행정부조차 ‘중산층을 위한 외교’라며 미국 제일주의 노선이 강화돼 공공재 분담을 요구하는 동맹의 압박은 증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재 제공국, 즉 글로벌 중추국가로 전환하는 외교 문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그 비용 부담의 증대를 국민적 합의를 통해 이뤄가고 있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은 윤석열 대통령이 할 광복절 연설의 ‘숨은’ 대전제일 것이다. 새만금 잼버리 사태에서 보듯 충분한 성찰이나 국민적 합의가 없는 한 좋은 연설을 내놓기란 어렵다.
두 번째 난제는 다시 전쟁할 수 있는 세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탈냉전기 평화 기획은 전쟁을 걱정할 필요 없는 세상, 따라서 안보보다 경제가 중시되는 세상이 도래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은 P5(안보리 5개국)가 자행한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P5가 일방적으로 승전하지 못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또 한 번 충격을 주고 있다. 다시 경제보다 안보가 중시되는 세계가 돌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각국은 안전보장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더욱 큰 걱정은 전쟁의 양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기술전쟁의 우위와 재래 전력의 지속성을 동시에 보여줘, 대북 우위를 확고히 해 온 기술전쟁 신화의 한계를 입증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사용 가능한 핵무기’라는 개념은 남북 주민 모두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고 있다. 통합 억제와 확장 억제라는 동맹 팡파르의 이면에 있는 기술전쟁 우위 ‘신화’나 사용 가능한 핵무기라는 ‘위협’이 그 실행력을 완벽하게 확보하지 못할 경우 우리의 대북 억지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억지 실패에 따른 재난구호 체제에 의문표가 따라 붙는 한 제대로 된 평화연설이 나올 리 없다.
셋째, 북한 붕괴론은 허상이었음이 분명해졌다. 많은 전문가들이나 정보기관이 김정은 체제 붕괴론이라는 광풍에 기대고 있던 2015~2016년쯤 북한의 시장은 중국 경제성장의 파급효과를 최고조로 즐기고 있었음이 뒤늦게 알려졌다. 넘쳐나던 탈북민이 북한 붕괴의 신호라고 떠들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가져온 정보는 북한의 시장이 1990년대 이후 최고 수준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편 북한의 대량 살상무기에 대한 정보 실패도 분명해졌고, 현재의 한·미당국은 김정은 체제의 핵능력과 투발능력에 대처할 ‘외교적’ 수단을 내려놓은 듯 보인다. 이런 대북정책 실패가 ‘위협’의 실패라면 한국 보수의 실패이고, ‘보상’의 실패라면 한국 진보의 실패일 것이다. 그러나 위협과 보상 모두의 실패가 분명하고, 정보 실패까지 더해진 현 상황에서 남 탓으로 일관할 기념사라면 흥이 날 일이 없지 않겠는가?
넷째, 미국은 기존의 바퀴살 동맹을 넘는 나토식 집단방어 체제를 원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한·미·일 협력이 필요하고 한·일관계의 위계를 감내하라는 동맹의 메시지는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소신에 찬 정부라도 탈식민을 기념하는 날 한·일 협력 논의를 그리 쉽게 다룰 수는 없을 테다. 여기서 윤 대통령이 느닷없이 유엔군사령부를 찾아 종북 논란에 불을 붙인 이유가 궁금해진다. 유엔사라는 게 사실상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일본의 한반도 연계 고리라는 점 외에는 법적 실효성이 없는 상태임을 모를 리 없는 정부가 유엔사 반대를 종북으로 프레임 지운 것은 왜일까? 유엔사 반대를 ‘종북’으로 모는 순간, 유엔사 찬성은 ‘토착왜구’라는 죽은 논리가 살아나게 된다. 왜 이 같은 이분법 언어로 무리수와 자충수를 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난제들이 대한민국엔 ‘넘사벽’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이를 이분법 언어로 다루다 보면 메시지는 선명할지언정 외교적 치우침은 심해진다. 차라리 광복절 맞이를 ‘로 키’로 하자는 판단이 ‘외교 늘공’의 균형감이라면 침묵의 힘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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