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진의 수학 인문학 산책] 하향평준화라는 신화
우리나라 학생들은 놀 시간도 없고 취미생활을 할 시간도 없이 학업에 매달리는 ‘교육 지옥’에 빠져 있다. 이러한 학생들의 과다 학습과 사교육 문제는 교육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심각한 저출생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 사교육과 과다 학습 문제를 생각할 때 기성세대의 상당수는 ‘대학입시’를 떠올린다. 아마도 자신들 학창 시절의 강렬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육 문제를 대학입시 제도를 이리저리 바꾸거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문제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없애라고 지시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것이 사교육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킬러 문항이란 것이 진짜 공교육의 범위를 벗어난 것인지 등은 차치하고, 수능 문제를 개선하려는 시도 자체가 사교육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고 있다.
대다수 어른들의 생각과는 달리 사교육과 과다 학습 문제의 핵심적인 대상은 고등학생이 아니라 중학생이나 초등학교 고학년생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사교육을 가장 많이 받는 학년은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3학년이다. (고등학생도 고1이 고3보다 비율이 더 높다.) 즉 우리의 ‘불쌍한’ 아이들은 고등학생들이 아니라 그보다 어린 학생들인 것이다. 고등학생들은 이미 머리가 커서 부모 마음대로 사교육을 시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린 학생들은 다르다. 10대 초·중반은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다양한 활동을 함으로써 사회성과 기초소양을 키워야 할 때인데 학생들은 과다 학습에 내몰리고 있다.
이런 상황은 근본적으로 ‘고교 비평준화’와 연관돼 있다. 전국에 특목고·자사고가 너무 많은 데다가 중학교 교육과정까지는 사교육을 통해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에 과학고와 과학영재학교가 모두 28개나 있다. 자율형 사립고(자사고)는 명문 자사고로 불리는 전국 단위 자사고가 11개가 있고, 광역 단위 자사고 23개, 국제고 8개, 외국어고 32개가 있다. 2017년에 실시한 자사고, 외국어고 폐지에 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폐지 찬성은 52.5%, 반대는 27.2%이다.
그러한 여론에 힘입어 교육부와 일부 지역 교육청이 자사고와 외국어고 폐지 정책을 실행에 옮겼지만 법원에서 이 정책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잇달아 내는 바람에 폐지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현 정권은 자사고, 외국어고의 존속을 지지하고 있다.
고교평준화를 당장 시행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첫째는 지역 간 불평등이다. 예전의 강남 8학군 문제와 같이 학생들이 사는 지역에 따라 학력 차이가 나게 되고 서울의 경우, 강남 3개구의 집값이 치솟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대학입시에서 지역균등 또는 학교균등의 비율을 높이는 방안, 수시전형에서 학생부종합전형보다 학교 내신을 중시하는 학생부교과전형의 비율을 높이는 방안 등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둘째는 하향평준화 문제다. 나는 사람들이 상식으로 여기는 ‘고교평준화는 하향평준화를 가져온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고교평준화 1세대인데 서울대에 입학한 우리 동기들이 1년 선배들보다 학력이 뒤지지 않았고 후배들의 학력도 그러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모아서 가르치면 더 효율적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명문고에서도 상위권이 아닌 학생들은 학습의욕이 떨어지는 반면, 일반고의 상위권 학생들은 남들의 관심과 칭찬 덕분에 학습 의욕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2025년부터 ‘고교학점제’가 전면 실시된다. 대학처럼 수강신청을 해서 과목을 듣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준별 수업이 좀 더 용이해질 수 있다.
당장 고교평준화로 돌아가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일부 과학영재학교나 지방의 명문 자사고는 존립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특목고·자사고의 수를 줄이는 것이 옳은 방향일 것이다. 지금은 명문고가 너무 많아서 그런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면 낙오자라는 인식이 퍼져 있고 학부모들은 초조해한다. 그런데 정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얼마 전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앞으로 과학영재학교를 2개 더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어떤 교육 정책이든 그에 따르는 부작용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절대적으로 옳은 정책이란 있을 수 없다. 정치적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지혜를 모으는 태도가 필요하다 하겠다.
송용진 인하대 수학과 교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프고 계속 커지는 켈로이드 흉터··· 구멍내고 얼리면 더 빨리 치료된다
- “남잔데 숙대 지원했다”···교수님이 재워주는 ‘숙면여대’ 대박 비결은
- [스경X이슈] 반성문 소용無, ‘3아웃’ 박상민도 집유인데 김호중은 실형··· ‘괘씸죄’ 통했다
- ‘해를 품은 달’ 배우 송재림 숨진 채 발견
- 윤 대통령 골프 라운딩 논란…“트럼프 외교 준비” 대 “그 시간에 공부를”
- ‘검찰개혁 선봉’ 박은정, 혁신당 탄핵추진위 사임···왜?
- 한동훈 대표와 가족 명의로 수백건…윤 대통령 부부 비판 글의 정체는?
- “그는 사실상 대통령이 아니다” 1인 시국선언한 장학사…교육청은 “법률 위반 검토”
- 3200억대 가상자산 투자리딩 사기조직 체포… 역대 최대 규모
- 머스크가 이끌 ‘정부효율부’는 무엇…정부 부처 아닌 자문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