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에서 서로를 책임지는 방법

한겨레 2023. 8. 1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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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행사에 참석했던 대원들이 13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세상읽기]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새만금 잼버리’를 지켜보는 마음은 하루하루 괴로웠다. 대규모로 사람이 몰렸을 때 참사가 일어나도 책임지지 않는 국가를 목도해온 한국 주민의 트라우마일까. 이례적인 폭우로 하루아침에 지하차도에서 사람이 죽고, 약해진 지반에서 산사태로 동물과 사람이 쓸려가고, 일상이 마비될 폭염인데도 기후전환 대책은 보이지 않는 정치와 행정이 불안해서일까. 나무 하나 없는 간척지에 지어진 텐트와 천막을 보면서, 수만명 청소년이 대규모 토건 국책사업 도구와 명분으로 초대됐구나, 수치와 자괴감이 밀려왔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라고 현대사회를 일컬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위험이다. 실재하는 객관적 위험과 사회구성원들이 예상하고 인식하는 위험, 두가지 위험이 현대사회에서 증대한다고 그는 말했다. 발생한 위험에 제대로 원인 규명, 재발 방지가 이뤄진다면 사회구성원의 위험 감수성은 높아진다 해도 그것이 불안으로 닥쳐오는 속도는 낮아질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위험 발생 이후의 모습은 위험감각과 불안을 더 높인다. 그뿐 아니다. 책임지는 주체, 대책을 요구할 대상이 없다. 평등, 보편성과 공공성이 있어야 할 곳에 이윤, 기득권, 행정편의, 회피와 모면이 들어앉고, 사회구성원들은 포기와 체념으로 내쫓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구성원들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까.

새만금 잼버리에 참여한 청소년들과 인솔 스태프들의 하루를 떠올려본다. 폭염은 만사를 힘들게 했을 것이고, 막 지은 간척지 바닥에서는 모기가 일어나고 수도에서는 더운물이 나왔을 터다. 그러나 나 혼자만 시원한 곳을 찾아 숨고 수도꼭지를 독차지했을까? 그 반대였을 것 같다. 평소보다 더 물었을 것 같다. ‘괜찮아?’ ‘얼굴이 벌건데 의무실에 가봐야 하지 않아?’ ‘너무 힘들면 말해.’ 조금이라도 상황을 낫게 하는 노하우를 만들고 서로 알려주었을 것 같다. 힘들 때 모여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너무 아픈 사람이 많은데 대책이 필요한 거 아니야?’ ‘이대로 대회를 강행해도 되는 걸까?’ 문제의식을 모아 전달하고 결과를 요청했을 것이다. 뉴스를 읽고, 밖의 이들에게 조언을 들었을 것이다. 위험을 감각하고, 사회적인 의제가 되는 길에 사람들은 모여 있다. 서로 붙잡고 보살피면서.

각자도생·각자도사 사회라고 하지만 위험 앞에서 사람들은 혼자가 아니라 모여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재난 영화에서도 사람들은 모여 있다. 힘이 센 사람과 걷기 어려운 사람이 함께. 살아남자고 도닥이고 대책을 강구한다. 모임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역할한다. 제도, 정부, 행정에 기대하는 역할을 작은 단위가 이미 시작하고 있다. 정치가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를 부축한 이들이 긴 터널을 지나왔을 때 바리케이드로 막거나, 사회 위협 세력이라고 간주하거나, 구출해주겠다면서 배신하거나,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을 자기 치적으로 가로채고 홍보하고 이득을 높이는 데 이용하지 않는 것은 최저선이다.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은? 버티던 이들의 힘이 빠져버리기 전에 신속하게 판단하여 응급 구조를 하고, 사고의 원인을 찾아내고,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고, 이 문제를 잊지 않도록 사회적 기억을 만들고, 대안을 제도적으로 법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생존해온 이들의 경험과 노하우에 경의를 표하면서.

성폭력상담소에서 성폭력 피해 생존자와 함께 일하면서 배운 것은, 내게 일어난 일이 공공의 일이며, 정치적인 일이라는 점이다. 성희롱, 성폭력은 은밀히, 나에게만 일어난 개인적인 일처럼 반복된다. 피해자 혼자 감당하거나, 죽어야만 끝날 일로 여겨진다. 그러다 세상의 변화된 감수성·지식을 만나고 피해자는 위험 상태를 깨뜨린다. 주변 사람과 의논하고, 직장과 학교에 알리고, 다른 피해자는 없는지 확인한다. 문제의 원인과 개선 사항을 요청한다. 개인의 문제를 공공의 문제로 모색해온 이들과 함께해온 수많은 동료 시민들 덕분에 한국 사회는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와 체계를 그나마 만들어왔다.

사회구성원들은 이미 서로를 책임지고 있다. 이것이 사회 전체의 책임 구조가 되게 하는 게 정부와 정치다. 총선이 다가온다. 정치를 맡을 이들이 각자도생·각자도사를 부추길지, 아니면 막아내고 함께 사는 방안을 제시할지, 정치의 응답을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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