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순서 러·일은 전쟁을 꾀했지만 안중근은 동양의 평화를 꿈꿨다
[왜냐면] 정재환 | 역사학자·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
나지막한 울타리 너머로 이국적인 러시아풍 역사가 눈에 들어온다. 기적 소리도 들리지 않고 기차도 승객도 보이지 않는 뤼순역은 고즈넉한 풍경을 자아낸다. 1903년부터 1세기 넘게 질주하던 기차가 멈춰 선 것은 2014년이었고, 듬성듬성 돋아난 수풀에 묻힌 철로는 나날이 붉은색을 더해 가고 있다. 뤼순은 중국 땅인데 역사는 왜 러시아풍일까?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은 물론 타이완과 펑후제도, 랴오둥반도를 할양받았다. 일본은 승전으로 엄청난 돈과 영토를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대국 청을 제치고 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했다. 메이지유신과 함께 기치를 올린 근대화, 산업화, 부국강병의 달콤한 첫 과실이었다.
문제는 랴오둥반도였다. 남진정책을 취하던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는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이 랴오둥을 장악하는 것에 제동을 걸었다. 청국의 안전, 조선의 독립 지위 유지, 극동의 평화, 유럽 각국의 원활한 상업 활동을 위해 일본의 랴오둥 점령은 절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일본 열도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삼국에 대항할 힘은 없었기에 랴오둥은 다시 청에 반환됐다.
도긴개긴 검은 손을 내민 것은 러시아였다. 1896년 6월 러시아는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상호 안전을 도모한다는 구실로 ‘러·청 밀약’을 체결하면서 랴오둥 반환에 대한 보답으로 북만주를 횡단하는 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했다. 1898년에는 청을 압박해 뤼순과 다롄을 조차했으며, 남만주철도 부설권도 가져갔다. 그 결과 하얼빈과 다롄, 군항인 뤼순항을 잇는 철로가 건설돼 러시아풍 역사가 탄생했다.
그런데 역사 뒤 산꼭대기에 우뚝 선 탑은 무엇일까? 삼국간섭으로 쓴잔을 마신 일본은 10년 동안 와신상담한 끝에 1904년 2월8일 뤼순항을 기습하면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불시의 습격에 큰 타격을 입었지만, 러시아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뤼순항은 난공불락의 요새여서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일본은 뤼순항을 점령하기 위해 배후에 있는 따구산, 샤오구산, 얼링산(203고지) 등을 공격했다. 8월에 시작된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에서 일본은 5만이 넘는 사상자라는 큰 대가를 치르며 신승을 거뒀다.
이후 일본은 여세를 몰아 펑톈(현 선양)과 대한해협에서 승리했다. 1905년 8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중재한 포츠머스회의 결과 휴전이 성립됐다. 한국과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한 일본은 10년 전 러시아에 밀려 반환했던 랴오둥반도를 차지했고 뤼순항, 뤼순역뿐 아니라 1902년 러시아가 건립한 뤼순감옥을 접수했으며 러시아 병영에는 관동법원을 설치했다.
랴오둥 점령 4년 뒤인 1909년 일본은 뤼순항이 내려다보이는 바이위산에 높이 66.8m의 거대한 표충탑을 세웠다. 전몰 군인을 추모하는 촛대와 촛불을 형상화했다고 하나, 아무리 봐도 무력과 침략을 상징하는 포탄에 가깝다. 불과 10년 사이에 주인이 바뀐 뤼순항, 뤼순감옥, 관동법원, 뤼순역 그리고 바이위산 탑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청국 영토에 러·일 두 나라가 남긴 패권주의의 증거이자 침략주의의 유산이다.
1909년 11월3일 찬바람을 가르며 뤼순역에 멈춰 선 기차에서 포승줄에 묶인 한 사내가 내렸다.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다. 일제는 안 의사를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탁월한 정치인을 죽인 무지몽매한 흉한으로 몰았지만, 법정에 선 안 의사는 식민지배의 마수를 감춘 이토의 위선적 동양평화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독립된 지위의 한·중·일 3국이 함께 만들어 갈 진정한 평화를 주창했다.
“새로운 정책은 뤼순을 개방해 일본, 청국, 그리고 한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의 대표를 파견해 평화회의를 조직한 뒤 이를 공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는 일이다. 뤼순은 일단 청국에 돌려주고 그것을 평화의 근거지로 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히라이시 뤼순 고등법원장과의 면담 기록 ‘청취서’ 가운데)
러시아와 일본에게 뤼순은 정치·군사적 요충지로서 침략의 교두보였다. 하지만 3국이 주도하는 평화회의를 설립해야 한다고 역설한 안 의사에게 뤼순은 동양 평화를 실현할 근거지였다. 같은 뤼순에서 러·일은 전쟁을, 안중근은 평화를 꿈꿨다. 1910년 3월26일 안 의사는 옥중에서 집필하던 자신의 ‘동양평화론’을 완성하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안 의사의 평화 사상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전 세계를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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