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타’ - 눈떠보니 후진국 6
권태호 | 논설위원실장
온 국민이 마음 졸이던 ‘2023 새만금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가 끝났다. 잼버리에서 드러난 윤석열 정부의 무계획·무능·무책임은 이젠 놀랍지도 않다. 다만 내심 ‘이젠 우리도 선진국’이라며 자긍심을 갖던 국민들이 하루아침에 시시포스가 된 듯, 과거로 되돌아간 듯 허망한 느낌을 갖게 됐다. 길에서 잼버리 대원들을 만난 시민들이 “미안하다”며 생수와 아이스크림을 선물하는 것도 이런 심사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후진성은 사태 수습 과정에서 더 도드라졌다.
전시 국가 동원령을 연상시킬 만큼 기업·대학 등 민간 부문이 자산과 서비스를 집중 투입해야 했다. 과정도 전격의 연속이다. 갑자기 콘서트 날짜와 장소를 바꾸고, 출연을 취소했던 아이브가 “잼버리 대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예정된 다른 일정을 접고 출연하고, 콘서트 날짜에 열릴 예정이던 한국방송(KBS) ‘뮤직뱅크’가 취소되면서 애초 참가 예정에 없던 뉴진스도 이 콘서트에 참가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예정에도 없던 대규모 행사를 치르기 위해, 태풍의 북상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행사 전날에도 무대를 준비했다. 국난 극복을 위해 온 국민이 총화단결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분투하는 모습이었다. 문체부는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상품과 방탄소년단 포토카드 등이 들어 있는 ‘콘서트 리멤버 키트’를 스카우트 대원 4만3천여명 전원에게 선물했다. 하이브가 8억원, 카카오가 10억원을 지원했다 한다. 문체부는 “자발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동등하게 비교할 차원은 아니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도 미르재단과 케이(K)스포츠재단에 국내 40여개 기업이 774억원을 ‘자발적으로’ 출연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런 상황을 두고 “위기관리 대응 능력을 보여줬다”고 했다. ‘위기’를 만든 건 정부고, ‘대응 능력’은 온 국민이 보여줬다. 참 손이 많이 가는 정부다. 정부가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부를 걱정해야 한다.
어떤 나라 정부를 ‘후진적’이라 평가할 때는 해당국 경제 수준 외에도 국가 운영이 체계적이지 않고, 주요 결정이 독단에 의해 즉흥적·비공식적으로 내려지고, 과정이 불투명하고,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 때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후진성은 호우 피해 실종자 수색 명령을 수행하다 숨진 채아무개 상병 사건 수사 과정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해병대 수사단은 구명조끼도 없이 급류에 병사들을 투입한 데 대해 임성근 해병대 제1사단장 이하 8명에게 과실치사 혐의 결론을 내리고, 7월30일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뒤집어졌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장관 지시’라며 보류하라고 했는데, 수사단이 이를 어기고 8월2일 경북경찰청에 수사 결과를 이첩했고, 이에 군검찰이 박정훈 수사단장을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했다는 게 국방부의 주장이다. 박 수사단장 말은 다르다. 사령관에게 “이미 (7월)28일 유족에게도 설명된 상태라 유족들이 반발할 수 있다”며 경찰이 판단하도록 하는 게 낫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사령관은 ‘어떡하지, 어떡하지’라며 결정을 못 내렸다고 주장한다. 또 박 수사단장은 “국방부가 ‘직접적 과실이 있는 사람’(대대장 이하)으로 (혐의를) 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방부는 “초급 간부에게까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한 건 과하다”며 정반대 얘기를 한다. ‘대대장 이하’와 ‘이상’ 중 어느 쪽이 처벌받는지를 보면, 누구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간부 8명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과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결재 단계에서 언급할 일이다. 또 현장과 마찰이 빚어진다면 문서로 근거를 남겨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게 옳다. 그런데 구두로, 전화 통화로만 한다. 진실 공방을 벌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장에서 알아서 처리해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총체적 비겁이다. 박 수사단장의 ‘항명’이 아니라, ‘외압 의혹’을 수사해야 한다. 그게 선진적이고, 그 반대가 후진적이다.
마지막으로, 14일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 특별사면은 후진성의 정점이다. 대법원의 유죄 확정판결 3개월 만에 행정부가 뒤엎었다. 사법부 판단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행정부가 법원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대놓고 무효화하는 건 민주주의 근간인 삼권분립을 허무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총통제를 원하는가.
‘눈 떠보니 후진국’이다. 국민들이 정부 말을 잘 안 듣고, 법원이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언론이 정부가 원하는 대로 기사를 쓰지 않는 것. 그게 선진국이고, 그게 ‘자유’다.
(지난해 11월11일치부터 지난 2월24일치까지 박현 논설위원이 ‘아침햇발’란을 통해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는 칼럼 5편을 연이어 쓴 바 있다. 이 칼럼 제목은 그 순서를 이어 붙였다.)
논설위원실장 ho@hani.co.kr
지난달 호우 피해 지역에서 실종자 수색 작업 도중 순직한 해병대 고 채아무개 상병의 유족이 언론에 채 상병의 이름을 보도하지 말 것을 해병대사령부를 통해 요청해왔습니다. 한겨레는 유족의 뜻을 존중하여 ‘채아무개 상병’으로 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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