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 없는 규모의 일본군 위안부 제도, 여성 폭력 구조화의 결과”

김종목 기자 2023. 8. 1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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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 학술회의
전쟁이라는 역사적 경험 공유하는 한·일·독 학자 참가
독일군이 1941년 바르샤바의 졸리보시 지구에서 폴란드인들을 습격해 납치하고 있다. 선택된 젊은 여성들은 나중 성매매 업소로 강제 이송됐다. 위키피디아

2023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 학술회의는 전시 성폭력·성노예, 젠더 논의를 확장하는 회의였다. 일본인 위안부 문제와 독일군 성범죄, 조선 내 창기, 냉전하 한미일 ‘위안’ 정책도 논의 대상이었다. 11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열린 ‘내셔널리즘과 성동원, 그 연속과 단절(국가의 성관리 체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일본 학자들과 독일 학자도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전시 성범죄 문제는 일본군의 그것에 비해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레기나 뮐호이저(독일 함부르크 학술문화지원재단 연구원)는 ‘제2차대전 상시 군매춘/군성노예 제도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관하여’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뮐호이저는 “오늘날, 독일의 유럽 침략과 홀로코스트 당시의 성폭력 연구가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독일 남성과 협력자들이 성적 협박, 성적 고문, 집단 강간 등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을 저질렀다. “일부 여성들은 성매매업소로 끌려가 성적 노예가 됐다”고 했다.

나치가 같은 게르만계로 여긴 네덜란드보단 노골적 침략 대상이었던 폴란드와 소련 여성들의 피해가 컸다. 뮐호이저는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 나치의 기아 정치, 가난, 그리고 계속 증가하는 점령과 대량 학살의 강도 때문에 이곳(소련과 폴란드)의 강요와 폭력은 불균형적으로 더 높았다”고 했다. .

뭘호이저는 마리스 로이스 맥컬로치의 러시아 로스토프나도누 나치 독일 국방군 성매매업소에 관한 미시 연구를 소개했다. 이 업소는 1942년 12월 24일부터 1943년 1월 말까지 약 4주 동안 운영됐다. 많은 여성이 독일로 강제 노동을 하러 갈까 봐 이 업소로 가 일했다. 이들은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됐다. 여성들 간 대화도 처벌 대상이라 업소 안에서도 고립됐다. 담당 의사는 여성들을 학대하고, 강간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13일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정의기억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나비문화제를 진행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소련에서 독일군이 거리나 나이트클럽을 급습해 여성들을 붙잡았다는 목격담도 나왔다.

뮐호이저는 마렌 뢰거의 연구 사례도 인용했다. 1940년 9월 25일, 독일제국의 총독 아르튀르 그리저는 폴란드의 독일 합병 지역인 바르테가우에서 “독일인과 성관계를 가진 폴란드 여성들을 매춘업소에 배치할 수 있다”는 명령을 내렸다. 판매원 마리아 K라는 폴란드 여성이 1940년 5월 독일 남성과 ‘금지된 성관계’를 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해 11월 23일 성매매업소로 보내졌다. 1943년 5월 마리아 K는 아우슈비츠로 추방됐다. 1943년 10월 4일부터 25일까지 수용소 성매매업소에서 성노예가 됐다.

독일군은 강간을 사소한 것으로 여겼다. 독일 국방군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군 판사들에게 강간범을 심각하게 처벌하는 것을 면제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뭘호이저는 독일 국방군 성매매업소와 일본군 위안소를 비교했다. “양국 군 지휘관들은 남성의 성욕이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남성들이 신체적, 심리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성적 만족이 필요하다고 가정”했다. 일본과 독일의 두 시스템 모두 “여성은 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군인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원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차이 하나는 독일의 경우 성매매업소를 차린 이유에 “병사들이 (군내 및 지역 남성들과) 동성애적인 만남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하려는 목적이었다는 점이다. 여성들의 인신매매에 크게 의존한 일본군에 비해 독일군의 인신매매 관련성은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한다.

뮐호이저는 나치 독일 국방군 성매매업소 여성들의 현실을 거의 알지 못한다고 했다.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교묘히 심어졌고, 지금도 심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레기나 뮐호이저 독일 함부르크 학술문화지원재단 연구원이 지난11일 ‘제2차대전 상시 군매춘/군성노예 제도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관하여’를 발표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후지메 유키(오사카대 교수)는 ‘여성사로서 일본군 위안부 연구와 일본인 위안부의 불가시화 문제’를 발표했다. 2000년대 민주당, 사회민주당, 일본공산당의 야당 3당이 국회에 제출한 ‘전시 성적 강제 피해자 문제의 해결을 촉진하는 것에 관한 법률안’에서 일본인 여성은 배제됐다. 일본인 위안부를 두고 “매춘부다. 돈을 받고 일한 기생이다” “당시는 매춘이 합법이었고, 평범한 일이었다” “외국의 군대에서도 하고 있었다”는 식의 모욕과 혐오 발언이 나온다.

후지메는 혐오 발언 등이 “여성 억압적 사회 통념에 가볍게 의존하는 것을 통해, 공창제도에 면죄부를 주고, 냉전 체제하의 미군이나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마치 일본은 책임이 없으며, 게다가 외국군 성폭력 문제를 경미한 문제로 착각하게 만든다”고 했다.

후지메는 “여성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창제도와 위안부 제도의 연관성은 뚜렷하며, 일본군 성폭력에 의한 큰 피해자 집단으로서 일본인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점은 명백하다”고 했다. “여성사적 관점으로 되돌아 가 보면, 공창제도는 ‘공권력에 의한 성매매 통제’ 제도이며, 국가가 그 경영 주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경찰은 공창제도라고 하는 합법화된 폭력의 법적 집행자였으며, 창기(娼妓)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달아나게 되면 경찰이 강제력을 발휘하여 유곽으로 되돌려 보내는 역할을 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지금 서울 중구 ‘신정’ 유곽.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후지메는 혐오를 일삼는 쪽이 연합국의 일본 점령 시기 일어난 미군 성폭력 문제나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면죄론을 주장하기 위해 제멋대로 이용해 왔다고 지적한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유례없는 규모로 행해졌고 또 흉포한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은, 군국주의와 식민지주의가 수반하는 상업 매춘 그리고 공창제도에 의해 아시아 태평양 전쟁 개전이 단행되기 전까지 여성에 대한 폭력이 구조화되어 있었던 결과이다. 또한 구미의 여러 나라 군대에 있었던 ‘상업’ 매춘도 군사 지배력을 전제로 한 여성 학대이며, 직접적인 여성에 대한 폭력을 수반하고 있었다.”

후지메는 냉전하 한미일 군사 동맹 체제에서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한국인) 여성이 당한 군사적 성폭력도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연속된 것으로 봤다. 점령기 RAA(특수 위안시설 협회)로 시작된 일본 점령군 ‘위안’ 정책을 두고도 “일본 정부는 여성을 전시하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이용했는데, 패전하게 되자 자국 군대가 전투 지역에서 요구하고 있던 것과 똑같은 성적 ‘위안’을 상위에 서게 된 군(점령군)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제공했던 것”이라고 했다. 점령기의 RAA나 미일 양국 정부 협동을 통한 ‘매춘 제도’는 “일본 지배층이 전쟁의 최종 단계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점령군에게 여성을 제공했고, 미국은 이에 가담했다는 의미에서, 미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저지른 범죄, 군대 ‘위안부’ 정책”이라고 했다.

다케모토 니나 오차노미즈대 젠더연구소 연구원이 ‘가라유키상에게/으로부터 보는 성과 권력’을 발표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다케모토 니나(오차노미즈대 젠더연구소 연구원)가 ‘가라유키상에게/으로부터 보는 성과 권력’에서 공창 문제를 들여다본다. 가라유키상은 “일본이 개국한 후 해외로 건너가 성매매로 경제적 영위(營爲)를 삼았던 여성들”을 뜻한다.

다케모토는 “일본 정부에게는 대외 팽창에는 일본인 여성에 의한 성적 위안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인민의 해외 이식을 장려할 때 특히 창부 외출의 필요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중략) 부인의 벌이는 인민의 이주와 옮고 그름 모두 양립할 수 있다면 오히려 공공연히 허가하는 것이야말로 득책”이라는 말이나 타이완 병참감인 육군 소좌 히시지마의 “타이완에 오래 있는 남성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공창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두고 “관리된 여성의 신체를 일본인 남성에게 ‘공급’하려는 사고를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박정애(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의 성관리 정책과 관리되는 여성’의 문제의식은 후지메 글과도 이어진다. 박정에는 조선에 시행된 공창제의 식민주의 문제를 분석한다. 그는 우선 ‘위안부’ 제도가 “일본 내지의 창기제도보다 공창제(창기제도+예기작부에 대한 성관리 제도)와 성격이 더 가깝고, 일본 내지의 공창제보다 식민지 조선의 공창제와 성격이 더 가깝다”고 말한다.

박정애는 조선의 창기에 주목한다. 창기 수가 일관되게 상승세를 보이는 것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인 1933년부터다. 중일전쟁 이후 경기도 경제정세에 관한 기록에는 군인 유객이 늘어나 유곽(가시자시키) 경기가 좋다는 내용이 나온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의 성관리 정책과 관리되는 여성’을 발표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저 시기에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던 조선인과 일본인 창기들은 ‘위안부’일까 아닐까. 상하이의 군 상대 ‘작부’는 ‘위안부’라고 하면서 조선의 군 상대 ‘창기’는 왜 ‘위안부’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또 형식상의 자유폐업 규정에 적용받으면서 전시기에 군인을 상대한 일본 내지의 창기들은 ‘위안부’일까, ‘창기’일까”라고도 물었다.

이어 “식민지 가부장제와 사회경제적 차별구조 안에 놓였던 조선 여성이 예·창기가 되는 과정, 또는 전쟁 시기 ‘위안부’가 되는 과정은 식민주의 폭력구조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때의 예·창기와 ‘위안부’의 차이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정치적 폭력 상황이 평시의 폭력구조를 얼마나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는지 설명하는 것에서 나올 것”이라고 했다.

일본인 피해 여성 문제도 함께 들여다본다. 박정애는 “재조 일본인 창기들은 일본 내지의 창기보다 열악한 조건 속에 있다가 전쟁터 또는 점령지로 넘어갔다”고 했다. 조선인 여성 피해자와 일본인 여성 피해자 간 ‘피해 경쟁’을 우려한 박정애는 이렇게 썼다. “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본다는 것은, 조선인 피해자의 피해만을 강조한다는 뜻이 아니다. ‘강제성’의 정도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권위적인 사회에서, 피해인정을 받기 위해 피해를 서로 경쟁해야 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피해 경쟁이 결국은 누구의 이해를 옹호하는 결과로 돌아가는지 생각해야 한다.”

장수희(동아대 초빙교수)는 ‘자연스러움에 대해서 - 평화시의 문화와 전시의 폭력’은 성폭력과 민간인의 노예화가 “전쟁 중이기 때문에 늘 있는 일”로 인식되게 만든 시스템을 들여다본다. 이 시스템은 가해자들이 스스로 가해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다수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책임을 가장 하부의 ‘업자’에 전가하고 군부와 식민 종주국의 책임을 삭제”한다.

장수희는 전쟁 중 성폭력은 당연하고, 전쟁 중의 위안소 이용은 보통의 일이라는 인식은 전쟁의 전-후를 통해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가 주목하는 건 “여성들은 왜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 속에 놓여 있는가”이다. 자신들이 가는 곳에 대한 정보도, 자신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장수희는 “(이런 알 수 없음은) 가해의 시스템이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가해의 시스템 속에서 그 외부를 상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이 인지 불가능성이야말로 이 사건이 제노사이드임을 드러내는 근거”라고 했다.

장수희는 전쟁 중 전시 국가 시스템을 통해 ‘당연하게’ 일어났던 성적 폭력들이 전후 평시가 되면서 ‘문화’라는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본다. “자본주의화 된 문화적 매체들을 통해 여성혐오와 타자화가 교육되고, 군사주의와 군사기지 주위의 성매매와 기생관광에 의한 ‘유흥문화’로 지속되었다.”

장수희는 일제 강점기 성차별과 성폭력의 국가 시스템이 식민지 이후에도 이어졌다고 본다. “‘해방’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한 어떤 ‘단절’을 요청하고 있었으나 전쟁은 전쟁으로 이어졌고 식민지는 식민지 이후의 국가 시스템으로 이어졌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종전-미군의 점령-남한 정부 수립-한국전쟁-휴전과 냉전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여성들의 노예적 상황 또한 전쟁과 군부대와 함께 연장되고 일상 속으로 은폐되었다.”

일본군 허가를 받은 식당, 일본군 위안소, 오키나와의 A사인바(미군 위생검사 등을 통해 병사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해도 좋다는 A사인을 받은 가게), 한국의 미군 전용 클럽, 군기지 주변의 합법적 업소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한편으로 국가-군인의 성폭력, 민족차별과 젠더 차별로 관통되며 계속해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주”돼 나타난다.

장수희는 이 장소들을 겹쳐놓고 보기 위해서는 과거-현재-미래라는 근대적인 일직선적 시간성이나 평화/전쟁이라는 이분법적 시공간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지만 폭력이 관통하는 시공간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성폭력을 내장한 국가와 군대, 성폭력 문화 기계인 군사주의, 민족차별, 젠더 차별과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의 연관성을 잇는 문제의식이 시스템의 공식적 기록 속에서 제외되었던 존재들-성인 여성과 남성은 물론, 어린 여성들과 남성, 퀴어들과.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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