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깊어진 돈맥경화…비 올 때 우산 뺏지는 말아야
필자는 금융감독원에서 근무하던 1997년 외환위기와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때 저축은행 구조조정 업무를 수행했다. 그때 '저승사자'라는 별칭까지 들어가며 '적기 시정조치'라는 자동격발 권총을 가지고 무리하게 충당금 적립을 요구했다. 건전성지표가 일정 수준을 밑돌면 이유를 불문하고 총알을 쏴댔다. 퇴직 후 7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경직된 구조조정 방식을 취한 게 아닌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니 과거와 같은 경직된 방식의 감독 정책이 능사였을까 싶다.
2021년 하반기 시작된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과 함께 은행의 여·수신 금리도 꾸준히 상승했다. 특히 지난해 말 레고랜드 사태로 인한 신용경색으로 장·단기 시장금리가 큰 폭으로 오르는 과정에서 은행의 여·수신 금리도 크게 출렁거렸다. 그 뒤 시장 안정화 조치로 불안이 줄고 대출 가산금리 인하, 수신금리 인상 자제로 상당폭 반락했지만 여전히 은행 여·수신 금리는 5월 기준 5.12%와 3.56%를 기록하고 있다.
시장지표금리와 달리 레고랜드 사태 이후 시중에 돈이 돌지 않자 '돈맥경화' 현상이 심화됐다. 돈이 돌지 않는 데에는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큰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달 말 기준 가계부채 규모는 1062조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금리 인상 여파로 고스란히 가계의 빚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신용경색 현상은 부동산 시장에서 두드러진다. 주택 가격 하락세가 이어지면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 위험이 커지고 있다. 올 3월 말 기준 금융권 부동산 PF 대출 잔액은 131조6000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1조3000억원 늘어났다. 증가폭은 다소 줄었지만 2020년 말 92조5000억원이던 부동산 PF 대출 잔액은 2021년 말 112조9000억원, 2022년 말 130조3000억원으로 계속 증가했다. 연체율도 3월 말 기준 증권사가 15.88%, 저축은행과 여신전문금융회사가 4%대로 은행 등 다른 업권에 비해 크게 높다.
문제는 돈이 돌게끔 해야 되는데, 금융당국은 대손충당금 적립 등 리스크 관리 강화만을 주문하고 금융회사의 대출 태도도 더 깐깐해지니 상황은 개선 기미가 안 보인다. 돈이 안 돌 때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정상적인 PF 사업장이 무너지거나 잠재 부실이 현재화하는 것이다. 최근 새마을금고 사태에서 보듯 저축은행 업계에서도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지난달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중소기업·소상공인에 대해 금융권이 '비 올 때 우산 뺏기'식으로 대응한다면 단기적으로 건전성이 개선될 수 있을지 모르나, 중장기적으로는 실물경제뿐 아니라 금융회사의 건전성에도 부정적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옳은 얘기다. 그러나 금융당국도 예외는 아니지 않나 싶다. 금융회사가 비 올 때 우산을 줄 수 있도록 충당금 적립 강화 등 채찍만 휘두르지 말고 어려울 때 돈이 돌게끔 한시적 금융규제 완화가 시급해 보인다. 가뭄이 심해져 더 깊어진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마중물을 더 많이 넣어야 하고 때맞춰 펌프질을 더 열심히 해줘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금융당국이 "금융은 생물이며, 정책은 타이밍"이라는 말을 되새겨봐야 할 때다.
[조성목 서민금융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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