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40년 먼저 반도체 설계 인력 양성한 美
설계대로 칩 제작 기회 없어
美 MIT는 40년 전에 한 일
갓 시작한 정부지원 더 확대를
반도체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에 비견되는 칩 설계의 혁명이 일어난 건 1970년대 후반. 그때까지만 해도 반도체 칩은 자와 색연필, 핀셋과 주머니칼로 설계했다.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교수는 책 '칩워'에서 "반도체 공장(팹)에서 경이로울 정도로 복잡한 패턴의 칩을 생산하면서도 그 설계는 중세 장인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 방식마저 팹마다 제각각이었다.
엔지니어 린 콘웨이는 이런 현실이 너무 후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련의 수학적 규칙을 적용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칩 설계를 자동화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학생들에게 그 프로그램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자기 나름의 칩을 설계해 팹에 넘겼고, 6주 후 완벽하게 작동하는 칩을 우편으로 받아 보았다.
이때부터 설계와 팹은 분리되기 시작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혁명 이후 작가는 글을 쓰는 데에만 집중했고 책 인쇄는 출판사에 맡겼듯이, 칩 설계자는 설계에만 집중하면 됐다. 칩 제작은 팹에 돈을 주고 맡겼다. 팹 기업은 수십조 원을 들여야 만들 수 있지만, 반도체 설계 기업(팹리스)은 수십억 원의 투자만 유치하면 창업이 가능했다. 이후 미국에 우후죽순 격으로 팹리스가 생겨났다. 이들은 다양하고 혁신적인 칩을 설계했다. 이를 일컬어 물리학자 카버 미드는 '반도체의 구텐베르크 혁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은 그 혁명에서 소외돼 왔다. 최근 정부가 "대학생이 반도체를 설계하면 그 설계대로 칩을 제작해주는 서비스를 지원한다"고 했을 때 새삼 이를 실감했다. 한국에서 반도체 설계를 전공하는 학부생은 자신의 설계대로 칩을 제작할 기회가 막혀 있다. 석·박사 과정의 대학원생 역시 비싼 가격과 오랜 대기 시간 등의 한계로 대부분 그 기회를 갖기 어렵다. 수십 년 전 미국 MIT 학생들이 한 일이 오늘날 한국 대학에서는 대부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한국 학생들은 자신들이 설계한 칩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완제품 칩을 보고 설계에 문제는 무엇인지, 더 나은 방법은 없는지 탐색할 기회도 갖지 못한다. 칩을 설계하고, 완제품과 비교해 피드백을 받는 미국 대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그나마 정부가 나선 건 정말 잘한 일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팹에서 학생들이 설계한 칩을 만들어주기로 했다는데 무조건 환영이다.
사실 이런 지원을 미국 정부는 40여 년 전에 했다. 콘웨이가 개발한 자동화 기술에 가장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건 미국 국방부였다. 국방부 소속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대학 연구원들이 자신들의 칩 설계를 최신 설비가 갖춰진 팹으로 보내 칩을 제작할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을 했다. 밀러 교수는 "DARPA는 미래 지향적 무기 체계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반도체에서는 교육적 기반을 구축하는 일에 훨씬 집중했다"고 했다. "미국이 풍부한 칩 설계자 풀을 갖추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업계 역시 대학을 지원했다. 반도체연구협회를 설립해 카네기멜런과 UC버클리 같은 대학에 연구 자금을 댔다. 1980년대 내내 이 두 학교의 학생들이 연이어 스타트업을 세웠다. 오늘날 모든 반도체 기업이 그 스타트업 중 3곳이 개발한 도구를 사용해 칩을 설계한다.
팹리스에서 한국은 시장점유율이 1%에 불과하지만 미국은 68%다. 미국이 오랜 시간을 축적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추격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후발주자인 대만의 시장점유율이 어느새 21%다. 추격의 최고 무기는 역시 '인재'다. 대학이 최고의 설계 인재를 배출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국방부는 반세기 전에 이를 국가 안보 문제로 인식하고 지원했다. 기업도 동참했다. 한국은 늦은 만큼 더 빨리 달려야 한다.
[김인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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