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강한, 서평연대 열네 번째[출판 숏평]
■남남-정영롱 만화(정영롱 지음 / 문학동네)
“누가 알았을까. 더운 여름에 남자친구랑 박 터지게 싸우고 돌아온 딸이 거실에서 자위 중인 엄마를 목격하게 될 줄은.”
글씨로도 보기 싫은 ××(강아지가 물그릇 핥는 소리라면 좋았겠지만 ‘그’ 소리가 맞다) 소리와 선풍기 소음뿐인 거실. 탁상형 거울을 다리 사이에 두고 한창 자위에 열중해 있는 엄마. 이 민망하고 호러블한 첫 장면을 빼놓고는 ‘남남’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자위라니,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행위다. 그러니 이렇게 목격한 상대가 엄마가 아닌 누구라도 불편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맞닥뜨려 버린 이상 ‘엄마도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고, 사람이야!’ 같은 깨달음은 무의미하다. 그걸 몰라서 민망한 게 아닐 테니까. 물론 내 엄마라서, 좀더 민망하고, 좀더 충격적이겠지.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이 미묘한 차이에 사로잡히는 대신 단순무식하고 실용적인 고민을 한다. ‘성인용품 같은 걸 사줘야 하나….’ 음, 이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가족’과 ‘가족 아님’ 사이에서, ‘정상’과 ‘정상 아님’ 사이에서, 제멋대로 삐뚤빼뚤 줄타기하듯 이야기가 뻗어 나간다. 엄마가 눈앞에서 자위를 하고, 불알친구가 커밍아웃을 했다고? 그게 왜? 이번 기회에 서로의 낯선 모습을 알게 됐다면 안심이다. 내일부터는 그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을 테니까. 서툰 애정과 허점 많은 유대가 쌓이고 또 쌓인다. ‘가족’이라는 글자도, ‘남남’이라는 글자도 뿌옇게 흐려져 구분할 수 없는 뭉텅이가 돼 버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저것을 뭐라고 부를까. 나는 사랑이라고 부르련다. (박소진 / 문화평론가, 웹소설작가,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사회적응 거부선언(이하루 지음 / 온다프레스)
나와 우리 세대는 선발되기 위해 배우고 벌어먹기 위해 일하고 권리를 확인하기 위해 소비하도록 길러졌다. 내 몫을 확보하지 못하면 남에게 폐를 끼쳐야 하고, 결국 외로워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똑바로 마주보기 어렵다. 모두를 거슬러 이하루는 적극적으로 외로워지기를 선택한 사람 같다. 가족과 단절하고 모국을 떠남에서 시작해 여행 후반에는 축산에 대한 관점을 두고 농부인 대안 가족, 예술인 공동체의 동료들과도 불화한다. 외국인보호소에서 감금을 감각하고 축산업에 희생되는 동물들의 눈을 들여다본 경험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다.
그는 주눅들지언정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저러다 왕따가 되는 것 아닌가 걱정스러운 순간 그에게 필요한, 그가 필요한 사람들이 서로 이끌고 폐 끼치고 품을 허락한다. 여행기의 형식을 띤, 동물해방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책이라고 요약할 수도 있겠다. 그보다는 한 사람이 온전히 자신으로 살고자 했을 때 삶이 어떻게 흘러갈 수 있는지 한 사례를 보여 주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여정은 설득력이 있고 매혹적이다. (서경 / 출판편집자, 9N비평연대)
■프로보커터(김내훈 지음 / 서해문집)
각종 정보가 범람하는 오늘날, 사람들 눈에 띄어 부를 창출하려면 독특하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생산해 내야 한다. 물론 이전에도 사람들의 주목을 갈구하며 관심을 자극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이른바 ‘관종’이라 불리는 이들이다. 세상이 변화하는 데 맞추어 관종의 콘텐츠도 진화하고 있다. 그 가운데 최근 급부상한 장르가 있으니, 바로 ‘정치’다. 투철한 진영 의식을 가진 이들의 주목을 끌고 양극단으로 의견을 몰아간다.
김내훈은 관종들이 생산한 문화정치, 그리고 그들로 인해 형성된 ‘주목경제’를 해부했다. 저자는 혐오와 경멸을 바탕으로 분노를 일으켜 주목을 받고, 그것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시대의 관종들을 ‘프로보커터’라고 칭한다. 프로보커터는 반지성주의의 흐름 아래 합리주의와 도덕성을 바탕에 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이다. 내 속을 긁어주는 ‘사이다’를 갈구하고 구현하려는 시민들,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며 오로지 혐오로 일관하는 관종의 시대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존중과 배려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지금, 젊은 사회학자는 선(善)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우리’의 넘실대는 극단주의를 당신들에게 낱낱이 고발한다. (윤인혁 / 사회문화비평가,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보이지 않는 집(백희성 지음 / 레드우드)
프랑스 파리의 건축가 루미에르, 건축가의 열정은 식어 버린 지 오래, 그에게는 회의감만이 남아 있다.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봉주르, 무슈 루미에르 클레제! 잘 지내시죠?”
파리 시내에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에 주택이 나왔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전화였다. 한평생 남을 위한 건축을 하고 열쇠를 넘겨주고 쓸쓸히 돌아서던 건축가에게 드디어 ‘나를 위한 건축’을 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파리 시내 중심부에 있는 저택은 족히 수백 년은 돼 보이는 낡은 집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수북이 쌓인 먼지들…. 남들에겐 손쓸 수 없는 흉물스러운 주택이겠지만 건축가 루미에르에게는 먼지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였다. 그 집은 마치 자신을 발견해 줄 건축가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집이란 게 뭔가요?”
집주인의 대리인 이자벨의 루미에르를 향한 날카로운 질문들은 어쩐지 루미에르를 테스트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리고 집주인인 피터왈쳐를 직접 만나야 한다는 것이 이 집을 사기 위한 ‘조건’이었다. 수표 그리고 스위스로 향하는 열차의 티켓이 담긴 봉투에는 집주인 피터왈쳐의 짧은 글귀가 담겨 있다. -부디 자신의 초대에 응해주기를.
스위스의 왈쳐요양병원에 도착한 루미에르는 오로지 건축가만이 느낄 수 있는 경이로움에 휩싸인다.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오감을 건드리는 이 병원은 무엇일까. 건축가는 누구이며 왜 나를 이곳에 초대한 것일까…. 루미에르는 편지의 초대에 응한 순간부터 수많은 질문에 휩싸인다. 사람이 남기고, 건축이 품고 있는 기억과 미스터리를 찾아내는 건축가 루미에르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승진 / 건축비평가, 9N비평연대)
■Y 교수와의 대담(루이 페르디낭 셀린 지음 / 이주환 옮김 )
소설 ‘Y 교수와의 대담’은 매우 희곡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자인 셀린과 Y교수(레제다 대령) 둘의 대화로만 전개되며, 중간중간 셀린이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나 그마저도 희곡의 지문 또는 독백과 같다. 희극적이면서도 엉뚱하고 유의미해 보이면서도 무의미한 대화들은 일견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시킨다(다만 Y교수는 갈리마르를 기다린다는 점에서 다르다).
화자 셀린의 말투는 자유롭고 신랄하며 작품 전체적으로는 해체적이다. 계속되는 말줄임표는 셀린이 이 작품을 통해 형식적 실험을 이뤄냈다는 점을 일깨운다. 속어와 비어가 점철된 노골적인 문체는 체계 없는 말들의 화려한 향연과 찰떡궁합이다. 셀린은 냉소주의자나 성격파탄자로 보이며 시건방지기까지 한데, 그 점이 독자로서는 무척 유쾌하다.
‘Y 교수와의 대담’은 국내에 딱 두 권이 번역돼 있는데, 하나는 워크룸프레스의 ‘Y 교수와의 인터뷰’다. 그중 이 책은 가독성이, 워크룸프레스의 것은 정밀함이 돋보인다. (김미향 / 출판평론가,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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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엄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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