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권, 무능보다 더 무서운 퇴행 [김민아 칼럼]
1980년대 중반, 청와대 바로 옆 고등학교에 다녔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국제사회 인정에 목말랐다. 끊임없이 해외 정상을 초청했고, 김포공항에서 청와대에 이르는 도로변에 시민과 학생들을 도열시켰다(당시 정상들이 이용하던 마포대로는 ‘귀빈로’로 불렸다). 나는 청와대 앞길에서 환영인파의 맨 마지막 배역을 수행하곤 했다.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 앞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박수를 쳤다.
멤버가 4인이고 소속사도 서로 다른 ‘마마무’가 완전체로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K팝 슈퍼 라이브(K팝 콘서트)’에 등장했다. 한 멤버는 팬 커뮤니티 사이트에 ‘(국가의) 부름을 받고’라는 표현을 썼다. 폭우 속에서 하이힐을 신고 춤추는 마마무를 보며 아득해졌다.
방탄소년단(BTS) 차출 압력에 시달리던 하이브는 걸그룹 ‘뉴진스’를 무대에 올렸다. 8억원어치 BTS 포토카드 세트도 기부했다. 카카오 역시 10억원 상당의 캐릭터 상품을 제공했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압수수색당한 다음날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자발적”이라고 했다.
기획재정부는 산하 공공기관에서 1000명을 차출해 K팝 콘서트에 오고가는 잼버리 참가자들의 인솔자 노릇을 떠안겼다. 기재부 역시 ‘자발성’을 강조했다. 일부 기관 직원들은 자발성이란 외피를 위해 ‘사다리 타기’로 차출 인원을 정했다고 한다. 만약 사고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나.
국민의힘은 금 모으기 운동을 소환하며 ‘국민 총동원령’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잼버리 파행은 외환위기 같은 국난이 아니다. SBS의 한 기자가 “사이비 국가주의”라는 표현을 썼는데, 공감한다. “무난한 마무리로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지켰다”(윤석열 대통령) “한숨으로 시작해 환호로 끝났다”(조선일보) 같은 인식도 거부한다. K팝 콘서트를 스카우트 대원들이 즐겼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부와 잼버리 조직위원회, 전라북도의 실패가 가려질 수는 없다. 외려 ‘자발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관제 동원’의 그림자만 짙어졌을 뿐이다.
퇴행이란 표현은 이제 클리셰 취급을 받는다. 그래도 써야겠다. 퇴행은 곳곳에 만연하고, 부인할 수 없이 선명하다. 무차별 흉기 난동과 살인 예고가 잇따르자 서울·부산·경기 성남 등에 장갑차가 배치됐다. 총기로 무장한 경찰특공대 요원들이 순찰에 나섰다. 불심검문도 강화했다. 달리기 하던 중학생이 흉기 소지자로 오인, 연행되는 과정에서 다친 사건은 징후적이다. 시민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민의 안전을 헌신짝 취급한 것이다. 앞의 시민은 누구이고, 뒤의 시민은 또 누구인가.
장갑차 배치나 불심검문 강화를 두고 ‘치안 포퓰리즘’이란 말이 나온다. 과대평가다. 윤석열 정권은 그냥 게으를 뿐이다. 불안에 떠는 시민을 안심시키긴 해야겠는데, 원인을 분석하기는 꺼려진다. 파헤치다보면 불평등·무한경쟁·각자도생에 대한 분노로 결론날 게 뻔해서다. 이를 돌파할 만한 정치적 상상력은 결핍 상태다. 예산을 더 쓰는 일도 싫다. 그러니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이 대학가에 세워두었던 장갑차를 도심으로 다시 끌고나온 것이다. 도대체 장갑차로 뭘 할 수 있나.
무능과 퇴행은 둘이 아니다. 유능하면 새롭고 창의적인 솔루션을 고민하고, 숙의하고, 결국 만들어낸다. 무능하면 옛날 대책, 그것도 수십년 전 것을 보여주기 식으로 재탕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권의 퇴행이 정책적 퇴행에 그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구명조끼조차 없이 실종자 수색에 나섰다가 순직한 채수근 상병 사건은 그 자체로 가슴아픈 일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실의 ‘수사 개입’ 의혹까지 불거지니 기막히다. 정책적 퇴행을 넘어 도덕적 퇴행의 징후다. 대통령실에선 “가짜뉴스”라 일축했지만 일방적 해명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퇴행의 징후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잼버리 참가자들의 안전을 강조하고, 윤희근 경찰청장이 사상 첫 특별 치안활동을 선포할 때 더욱 뚜렷해졌다. 이태원 참사 직후 책임지고 물러났어야 할 이들이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공복(公僕)’ 흉내를 내는 풍경은 우스꽝스러운 부조리극 같다.
무능과 퇴행에 무책임까지 겸비한 정권에서 인권이나 안전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나는 불심검문을 당하게 되면, 신분증을 제시하는 대신 경찰관의 공무원증을 요구하겠다. 기어코 신분증을 내놓으라면 차라리 경찰서까지 동행하고 말겠다. 1980년대가 아니라 2023년의 시민이기에.
김민아 칼럼니스트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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