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광장] ‘중국몽’의 비결, 포용과 지속성

2023. 8. 14. 11:1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不要 !(당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왕후닝)

“뭐라고! 그렇다면 난 당장 그만두겠다.”(시진핑)

두 남자는 격하게 맞붙었다. 왕후닝(王 寧)은 시진핑(習近平)보다 두 살 손아래였다. 자기보다 어린 자에게 모멸감 가득 찬 말을 듣자 시진핑은 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장 아픈 아킬레스건인 학벌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랬다.

당시에 시진핑은 이미 국가부주석이자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집권자 후진타오(胡錦濤)의 뒤를 이어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몸이었다. 왕후닝은 당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는 5년 후 시진핑이 집권하는 날에는 ‘죽은 목숨’이 될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시진핑에게 대차게 대들었다.

시진핑의 청소년 시절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가 아홉 살이던 1962년, 공산혁명가이자 부총리였던 부친 시종쉰이 반혁명 내용을 담은 소설 ‘류즈단(劉志丹)’의 집필 출판에 관여했다며 ‘반당분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실각돼 그로부터 무려 16년 동안이나 수감되는 참혹한 고초를 겪게 된다.

그의 나이 열다섯 살, 다니던 중학교도 1년을 다 못 채우고 서북지방의 오지인, 부친의 고향 섬서성 옌안시의 풀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황토고원마을로 내쫓겼다. 거처는 벼룩이 들끓는 토굴집이었다. 그곳에서 스물두 살 때까지 7년 동안이나 인분을 날라다 밭에 뿌리는 노역 등을 하면서 지냈다. 정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환경이었다. 시진핑은 이를 묵묵히 견뎌내면서 공산당 가입을 신청했다. ‘반당분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하다가 신청한 지 10번 만에 겨우 받아들어졌다.

1975년 가을, 겨우 그는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1976년 9월, 권력자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자 문화혁명의 광풍도 멎었다.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진핑은 추천입학제도를 통해 시험을 치르지 않고 명문 칭화대(淸華大) 화공과에 입학했다. 부친 시종쉰도 복권돼 광둥성(廣東省) 성장으로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해 1980년 5월, 광둥성의 선전시(深 市)에 중국 최초로 경제특구가 설치됐다. 덩샤오핑의 대표적 업적으로 알려진 ‘개혁개방’ 정책의 입안자는 사실은 시진핑의 아버지 시종쉰이었다.

시진핑은 대학졸업 후에 남부 푸젠성(福建省) 샤먼시(厦門市) 부시장 말단 직위에서 시작해 저장성(浙江省) 당서기, 2007년 3월에는 상하이시(上海市) 당서기에 취임했다. 이 자리는 나중에 시진핑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전기가 된다. 그를 상하이시 서기로 추천한 인물은 청칭홍이었다. 시진핑은 젊은 시절부터 청칭홍을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서로 막역한 사이였다. 청칭홍은 시진핑에게 평생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몇 달 후 정치국 상무위원들 가운데 6위의 자리로 승격되고 이듬해 국가부주석 자리에 올랐다. 중국 권력 내부에서는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6위는 차기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2012년 11월, 황토마을의 토굴소년 시진핑은 와신상담 끝에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등극했다. 부친의 누명도 벗겨졌다. 그는 집권하자 왕후닝을 발탁했고 시진핑 체제 제3기에 들어선 현재는 정치국상무위원 겸 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으로 권력서열 4위로 끌어올렸다. 주중일본대사를 역임한 미야모토 유지(宮本雄二) 씨는 시진핑을 가리켜 ‘중국인 특유의 상대방을 품어 안는 대인기질이 보였다’고 평가한 바가 있다.

왕후닝이란 인물은 30여년에 걸쳐 중국공산당의 지도이념과 정책이론을 기획, 입안하는 중앙정책실의 핵심 브레인이다. ‘붉은 황제의 책사’라는 별칭도 붙어 있다.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을 입안했으며, ‘중국몽’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국가의 원대한 구상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정성과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 공산당 창업자 마오쩌둥은 27년, 덩샤오핑은 17년, 장쩌민 13년, 후진타오 10년 그리고 시진핑은 현재 10년을 채우고도 앞으로 최소한 5년 이상의 집권을 보장받고 있다.

일본 자민당 일당지배 체제는 극히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1945년 이래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또한 30년 남짓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타이완 총통은 4년 중임제다.

우리나라만 유독 5년 단임제다. 짧은 임기 동안에 원대한 국가비전이나 청사진은 그릴 수도 없거니와 그런 정책을 실행할 힘도 안 생긴다. 제 아무리 유능한 대통령일지라도 물러나야 한다.

1987년에 제정된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 헌법 체계를 바꿔야 할 때가 왔다.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를 통해서 대통령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을 대안으로 내걸고 국민에게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술은 숙성해야 제 맛이 난다.’

장준영 헤럴드 고문(전 한국항공대 초빙교수)

bonsang@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