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 로커들의 사자후 '불꽃밴드'
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아이돌과 트로트, 힙합이 지배하고 있는 국내 대중음악 시장에 최근 반가운 TV 프로그램이 투척됐다. MBN에서 매주 목요일 방송 중인 '불꽃밴드'. "대한민국 최초 레전드 밴드 서바이벌" 내지는 "다시 타오르다 불꽃밴드!"를 표방하고 있는 이 뜨끈뜨끈한 7080 프로그램은 장르적 다양성 실현이란 점만으로도 일단 공익적 가치를 띤다.
더불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왕년의 록 스타들이 자신의 밴드를 거느리고 나와 기존 자작곡을 직접 편곡해 들려주는 방식도 비교적 참신하다. 제작진이 연출했을 밴드 사이 괜한 신경전은 프로그램의 흥행 때문에 부득불 넣었을 전략이었을 테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현장 분위기는 이미 경연이라기보단 잔치에 가깝다. 보는 입장에선 그저 즐기면 그만인 상황에 가까웠다. 다만 섭외된 밴드들의 면면을 보며 나는 과연 이것이 최선이었을까라는 생각을 지우긴 힘들었다. 이들 모두가 정말 "레전드"이고 "다시 타오를" 명분을 가진 팀인가. 내 대답은 '글쎄'였다.
쓱 훑어만 봐도 그렇다. 아무리 이철호가 역사의 뿌리를 공유한다고는 하지만 최이철과 김명곤과 이남이가 없는 '사랑과 평화'를 우린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까. 권인하는 차라리 '위(WE)'라는 밴드를 통해 보고 싶어 한 사람들이 더 많았으리라. 김종서 밴드는 꽤 오래 활동했지만 '레전드'라 부르기엔 아직 어색하다. 차라리 시나위와 나왔다면 어땠을까. 진짜 '레전드' 밴드였던 들국화의 중추 전인권이 자신의 밴드를 데리고 나온 것과 비교해 보면 그 무게 차이는 보다 확연해진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진정 '다시 타오를 레전드' 밴드로 인정할 수 있는 팀은 이치현과 벗님들, 전인권 밴드, 다섯손가락, 부활 정도라는 얘기다. 사랑과 평화는 핵심들이 빠져 이름 자체가 헐렁하고(차라리 '이철호 밴드'였다면 더 나을 뻔했다) 권인하 밴드는 여기에 낄 체급으로선 분명 모자라다. 차라리 산울림 출신의 김창완 밴드나 기타리스트 김수철이 '작은거인'을 앞세워 나왔다면 납득이 갔을 일이다. 그나저나 펼쳐 놓고 보니 70~80년대엔 한국이든 영미권이든 록 밴드란 남자들의 전유물에 가까웠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키보디스트 표명주가 경연 전 소감에서 "남탕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고 한 건 그래서 농담이지만 상징적이다.
어쨌든 경연은 시작됐다. 거두절미하고 '불꽃밴드'는 이두헌의 표현대로 "자로 잰 듯한 연주"를 들려주는 기타리스트 이치현과 이철호의 말처럼 "자신만의 분명한 색깔을 가진" 기타리스트 김태원의 대결 장이다. 또한 80년대 민주 세대가 낳은 고독의 가객(전인권)과 90년대 물질적 풍요에 깃든 야생의 로커(박완규)가 충돌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베이시스트와 드러머, 키보디스트들의 현란한 각축은 그 사이를 메우는 훌륭한 볼거리다. 이 글을 쓸 때까진 2화째를 마쳤는데 첫 화에선 출연 밴드끼리 상대평가를 했고 2화에선 관중들이 직접 평가를 했다.
나로선 완전체라 부를 순 없지만 사랑과 평화가 이철호의 노익장을 앞세워 거의 완벽한 무대를 보여주며 선전을 한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카를로스 산타나의 영향을 받은 이치현의 초창기 히트곡 '또 만났네'가 들려준 토토, 스틸리 댄 풍 매끈한 리듬도 물론 훌륭했고('또 만났네'는 이치현이 비지스의 가성 화음을 염두에 두고 화장실에서 5분 만에 쓴 곡이다) 듣는 순간 겨울 밤거리가 떠오르는 '사랑의 슬픔'을 기습한 이치현의 플루트 솔로 역시 은은한 백미였다.
특히 느슨한 듯 핵심을 찌르는 전인권의 노래는 굉장했다. 드라마에 삽입돼 크게 히트한 '걱정 말아요 그대'를 일필휘지로 부른 그의 완숙미는 같은 노래로 마이크 앞에 섰던 이적이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노래만으로 사람들 눈에 눈물을 고이게 할 수 있는 능력은 10년, 20년 불러 가질 수도 없을뿐더러 하늘이 그리 많은 사람들에게 주지도 않는 재능이다. 전인권은 그냥 타고난 가수였다.
반면, 부활의 경우 이승철이 불러야만 완전히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발라드 두 곡을 전혀 다른 성향의 박완규(심지어 김태원도 함께!)가 소화하면서 노래엔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이건 단순히 선곡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박완규는 옛날의 박완규가 아니다. 옥타브 위에서 놀지 못하고 옥타브 아래 눌리는 그의 아슬아슬한 컨디션은 출연자들이 예상했던 곡('Lonely Night')을 박완규가 끝내 부르지 못한 이유처럼 나에겐 보였다. 차라리 세상을 떠난 김재기를 다시 볼 순 없어도 '안녕'의 이성욱은 섭외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이성욱이 부른 '비와 당신의 이야기'와 'Never Ending Story'. 아마 박완규보단 훨씬 근사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방송을 보고 듣는 각자가 연주와 음악을 즐기면 되는 게 불꽃밴드다. 제작진은 시작부터 '서바이벌'을 강조했어도 그건 프로그램의 오락성을 위해 선택한 룰일 뿐, 이치현이 말했듯 이 대진표는 애초에 순위를 매기기 힘든 것이었다. 30~40년 이상 음악만 해온 사람들을 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선 무의미할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런 음악, 이런 밴드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그리고 권인하가 '실용음악' 세대의 안정된 연주 속에 새롭게 담금질한 '나의 꿈을 찾아서'로 시도했듯 그 시대 음악이 지금 시대에도 소통할 수 있으리란 당사자들의 기대와 자신감일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끝까지 타오르게 할 단 하나의 연료는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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