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요청 거절 못해… 성실하게 ‘이청준’ 복원”

박세희 기자 2023. 8. 14.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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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청준 평전’ 쓴 이윤옥 평론가
이청준 일기·가계부까지 받아
관계 맺었던 모든 이들 만나봐
“선생님은 출세 대신 자유 갈망
작품 통해 인문학적 질문 던져”
지난 1996년 고향인 전남 장흥에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소설가 이청준의 모습. 최근 출간된 ‘이청준 평전’에서 이윤옥 문학평론가는 소설가의 삶을 촘촘하게 복원해 이청준의 맨 얼굴을 드러내 보인다. 신현림·문학과지성사 제공

‘당신들의 천국’ ‘병신과 머저리’ ‘서편제’ 등 인간과 사회를 깊이 있게 성찰한 소설들을 남긴 한국 문학의 거목 이청준(1939∼2008)이 타계한 지 15년 만에, 그의 삶을 글로 촘촘히 복원한 ‘이청준 평전’(문학과지성사)이 나왔다. 지은이는 이윤옥(사진) 문학평론가. 이청준의 작품 평론으로 등단한 뒤 이청준의 소설을 다룬 글들로 평론집을 내고 총 34권의 전집 서지 비평도 맡아 한 그는 ‘이청준 전문가’다.

이청준은 2007년 7월 폐암을 선고받은 뒤 이 평론가에게 직접 자신의 평전 집필을 부탁했다. “부디 네 상상력이 내 상상력을 이겨 내가 꾀한 모든 자기합리화를 벗겨 내 맨 얼굴을 보여주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그러면서 자신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담은 일기와 메모, 가계부 등을 모두 이 평론가에게 건넸다.

자신의 맨 얼굴을 내보일 사람으로 이청준은 왜 이 평론가를 선택했을까. 둘의 인연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청준의 친구이자 이 평론가의 스승인 김치수 문학평론가 아들의 결혼식장에서 만남은 다른 문학도, 화가, 시인 등과 함께하는 ‘이청준을 사랑하는 사람들’(청사모)로 발전했고 종종 모임을 가졌다.

최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평론가는 “평전 쓰는 일을 사실 피하고 싶었다”고 했다. “전 지극히 평범해서 우리 소설사의 크고 높은 산인 이청준의 평전을 쓸 깜냥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건강하실 적에 받은 평전 집필 부탁은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요청은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성실하게 그의 삶을 복원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평전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청준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번 평전에서 ‘여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저자는 이청준의 문학적 삶에서 ‘여성’을 조명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청준 소설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주제들로 나왔지만 여성에 대한 것은 거의 없어요. 작품 주인공의 대부분은 남성이고, 그나마 있는 여성 인물들도 흥미롭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봤어요. 이청준의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이 ‘납작’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청준의 첫사랑은 ‘여선생’ 전정자다. 그가 다니던 회진국민학교에 부임해 1년도 채 안 돼 ‘빨치산이 되어 떠났다’는 소문만 남긴 채 사라진 그녀는 이청준에게 ‘여성’의 원형(原型)이 된다. 희고 고운 얼굴에 나긋나긋한 말투, 생전 맡아본 적 없는 향기로 기억되는 전정자는 이후 이청준의 등단작 ‘퇴원’부터 ‘여선생’ ‘신화의 시대’ 등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에 낸 산문집 ‘아름다운 흉터’에도 세세히 묘사한 것을 보면 이청준은 평생 전정자를 기억했다. 이청준의 두 번째 사랑은 호남 갑부 현준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만난 그 집 딸 현영민이다. 전정자와 비슷한 특징을 지녔던 그를 이청준은 열렬히 사랑했지만 끝내 ‘이상’으로만 남았다. 그 후 소설가는 아내가 된 남경자를 만났다.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이청준이지만 이 평론가는 그가 그려낸 여성의 모습은 조금 아쉽다고 했다. 그는 이청준 선생에게 직접 “선생님이 그리는 여성 인물은 실제 여성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 예로 여고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백조의 춤’을 꼽는다. “여고생들이 현실적이지 않고 그야말로 납작하게 그려졌죠. 지금 생각해보니 이청준의 생에서 뼈와 살로 된 실제 여성이 아내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책은 전남 장흥 시골에서 보기 드문 천재였던 이청준이 서울대 법대가 아닌 독문과에 진학한 것에 대해서도 길게 서술한다. 지방의 수재들은 서울대 법대에 가 출세하는 게 불문율이었던 시절, 고향 마을의 발전이 담보된 법대 입학을 거부했다는 것은 당시 고향 사람들에겐 큰 ‘배신’이었다. 이 평론가는 이 선택의 배경으로 현영민을 이야기한다. “이청준은 사람을 돈과 권력이 아니라 ‘자유’로, 문학으로 지배하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웬만한 돈과 명예로는 현영민의 집과 대등해질 수 없다는 자각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겠다는 야망이 그로 하여금 문학을 선택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성공하셨죠.”

이청준의 독문과 진학은 장흥 사람들을 좌절시켰을지 몰라도 한국 문학계엔 귀중한 자산이 됐다. 토마스 만의 ‘선택된 인간’을 읽은 후 “문학이나 소설이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치열한 인간의식의 구조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 이청준은 이후 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 담긴 모든 종류의 폭력을 인문학적으로 성찰한 걸작들을 내놓았다.

이 평론가는 “인문학적인 질문을 하게 하고 인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게 하는 작가가 바로 이청준”이라고 했다. 소설가가 타계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가 이청준의 문학을 읽고 그의 삶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컨대 ‘벌레 이야기’는 종교, 이데올로기, 극도의 신념이 갖고 있는 폭력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지금은 여기에 젠더 문제 등이 더해져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 폭력을 가하죠. 이청준을 제대로 읽어내면 성찰적인 시선을 갖게 되고 조금 더 나은 사회로 가지 않을까요. 전 그렇게 믿습니다. 이청준을 제대로 읽은 독자라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요.”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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