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북’하고 터지며 피어나… 1300년 된 씨앗도 ‘툭’하고 발아[박원순의 꽃의 문화사]
‘청정’‘초탈’ 불교 상징
흙탕물서도 고결하게 피어
유교선 ‘군자’라 칭하기도
꽃 지름 20~30㎝
동틀때 열리고 해질때 닫혀
한송이당 사나흘 지속돼
뿌리·잎·꽃·열매 모두 유익
식용 씨앗, 불면증 치료
연잎, 빈혈예방·항산화 작용
무더운 여름 고요한 연못에 한데 모여 군무를 하듯 일렁이는 연잎들과 화사한 연꽃을 보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아름다운 물의 정원의 계절을 실감한다. 원래 인도 등 아시아 지역이 원산지인 연꽃은 진흙이 가득한 흙탕물에서도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잎을 내고 고결한 꽃을 피워 아주 오래전부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져 왔다. 인도 힌두교에서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가 태초에 태양과 비옥함의 상징인 연꽃에서 스스로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지역의 물가나 습지에 터줏대감처럼 살아온 이력을 증명하듯, 연꽃의 속명인 넬룸보(Nelumbo)는 인도의 남동쪽 섬나라였던 실론(스리랑카)에서 연꽃을 일컫던 말에서 유래했다.
연꽃은 특히 불교와 가장 강력하면서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물질세계의 고통이 가득한 어두움을 지나 영혼의 자유와 깨달음을 얻는 불교 사상의 중심에서 연꽃은 청정(淸淨), 불염(不染), 초탈(超脫)을 상징하는 중심 이미지로 자리해 왔다. 연꽃 자체가 불교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고 있으며, 부처는 종종 연꽃 위에 앉은 형상으로 묘사된다.
중국 최초의 시가집인 ‘시경’(기원전 11~6세기)에는 진나라 이전 사람들이 신성한 연꽃을 우아한 여성의 상징으로 묘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보다 앞서 기원전 7000년에서 5500년 사이 중국의 신석기 시대 동안엔 일찍이 중부 비옥한 평원에 정착한 사람들이 이미 상당량의 연꽃 씨앗과 뿌리줄기를 먹거리로 수집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유교에서도 연꽃은 중요한 모티브였다. 북송 시대 유교 사상가 주돈이는 연꽃에 대한 예찬을 기술한 ‘애련설(愛蓮說)’에서 연꽃은 더러운 연못에서도 깨끗한 꽃을 피운다 하여 꽃 가운데 군자라 칭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연꽃에 대한 최초 흔적이 나타난 시기는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으로 보고 있는데, 백제, 신라, 고구려의 기와 및 고분벽화 등 여러 곳에 연꽃 문양이 등장한다. 조선 세종 때의 명신 강희안은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16종의 주요 식물 가운데 연꽃을 소개했다. 가령 연뿌리를 심을 땐 반드시 소똥을 땅에다 뿌려야 한다든지, 연꽃의 씨앗을 싹틔우려면 기왓장 위에 놓고 뾰족한 머리 부분을 갈아서 껍질을 얇게 한 후 진흙으로 봉하여 물속에 넣으면 된다는 등의 흥미로운 재배법이 수록되었다. 정조 때의 다산 정약용은 선비들과 함께 일 년에 수차례 꽃과 자연을 즐기며 시를 짓는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모임을 가졌다. 여름이면 동틀 무렵 서련지에 조각배를 띄우고 잘 여문 연꽃 봉오리가 마침내 ‘북’ 하고 터지며 피어나는 소리를 듣는 청개화성(聽開花聲)의 풍류를 즐겼다.
연꽃이 아름다운 자태와 신비로운 아우라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 온 것은 연꽃의 각 기관이 지닌 특별한 능력 덕택이다. 먼저 지름 40~80㎝에 이르는 동그란 방패처럼 생긴 잎은 발수 효과가 뛰어나다. 왁스 같은 큐티클로 덮인 특유의 미세한 돌기들이 물방울을 밀어내 잎 표면에 머무르지 못하고 굴러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또한 연못 바닥에 있는 뿌리로부터 잎자루가 수면 위로 아주 높이 자라나는 덕에 산들바람에도 연잎들이 흔들려 중앙에 고여 있던 빗물이나 이물질이 빠르게 떨구어진다. 이렇게 탁월한 자정 기능을 일컫는 연잎 효과(Lotus effect)는 오늘날 특수 나노 코팅제 개발 연구로 이어져 자가 세정 기능을 갖춘 의류나 발수 페인트 등에 활발히 적용되고 있다.
활짝 피면 지름이 20∼30㎝에 이를 정도로 큼직한 꽃은 주야간 개폐 및 자체 발열 기능을 장착했다. 햇빛과 온도에 반응하며 동틀 무렵 열리고 해 질 무렵 닫히는 꽃은 한 송이당 사나흘 정도 지속되는데, 밤에 닫혀 있는 동안엔 야행성 포식자들로부터 꽃가루와 생식기관을 보호하며, 외부 온도와 상관없이 꽃 내부의 온도를 30∼36도 정도로 유지시킨다. 동이 트면 꽃을 활짝 열어 밤새 간직해 둔 열기와 함께 향기를 발산하여 벌이나 딱정벌레 같은 꽃가루 매개 곤충들을 유혹한다.
극강의 능력을 지닌 것은 연꽃의 씨앗이다. 꽃이 진 후 꽃턱이 비대해지며 암술이 있던 자리마다 벌집처럼 여러 방이 생기며 연방(蓮房)을 형성하는데 그 안에 씨앗들이 하나씩 들어앉아 자란다. 다 익은 씨앗은 외부 환경과 철저히 차단된 매우 단단한 종피(씨껍질)로 싸여 있는데, 연꽃의 종명 누시페라(nucifera)도 견과를 맺는다는 뜻이다. 기약 없이 오랜 세월 동안 마른 진흙 속에 묻혀 있거나 물속에 잠겨 있는 동안 씨앗이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그 덕분에 땅콩만 한 크기의 연꽃 씨앗은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발아할 수 있어 꽃식물 가운데 가장 오랜 수명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1994년엔 중국 북동부 지역 마른 호수 바닥에서 발견된 1300년 된 연꽃 씨앗이 성공적으로 발아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2009년 경남 함안 성산산성서 발견된 연꽃 씨앗의 성분을 분석해보니 약 700년 전 고려시대 연꽃 종자로 확인되었는데, 일부 씨앗은 발아에 성공하여 이듬해 7월에 꽃을 피웠다. 고려시대 불교 탱화에서 볼 수 있는 연꽃과 비슷한 아름다운 색깔과 자태를 지닌 모습이었다. 함안 지역은 본래 옛 아라가야가 있던 곳이라 이 연꽃에는 아라홍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백, 수천 년 전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꽃이 이 시대에 다시 피어나 우리를 만나는 경험은 마치 주인공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타임슬립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특별하다.
연꽃이 유럽에 공식적으로 처음 소개된 시기는 1780년대 후반이었다. 왕립원예협회 회장이었던 조지프 뱅크스 경의 후원하에 도입된 연꽃은 난방 온실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재배되었다. 유럽에서도 연꽃 씨앗의 특별한 생존 능력이 주목을 끌었는데, 1840년대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의 첫 번째 식물학 책임자였던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이 연꽃 씨앗 발아 테스트를 진행하여 150년이 지난 후에도 발아력을 유지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연꽃 말고 북아메리카 대륙 원산의 또 다른 연꽃 종류가 있다. 노란색 꽃이 피는 미국황련(Nelumbo lutea)이다. 동양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오래전부터 이 연꽃을 성스러운 식물로 여겼고, 뿌리와 잎, 씨앗을 식용, 약용으로 사용했다. 아시아의 연꽃과 미국황련 사이의 교배로 많은 품종이 탄생했는데, 대표 품종으로는 ‘미세스 페리 디 슬로컴(Mrs. Perry D. Slocum)’이 있다. 미국의 유명한 연꽃 육종가가 1960년대 개발하여 자기 부인의 이름을 붙였는데, 첫날은 분홍색으로 피었다가 둘째 날은 연노랑을 변화하여 관상 가치가 아주 높다.
연꽃은 실생활에서 먹거리와 약재로도 오랫동안 이용되어 왔다. 식물체 전체에 독성이 없고 뿌리, 잎, 꽃, 열매 등 모든 부분이 유익해서 버릴 게 하나 없다. 특히 연씨, 연밥, 연자라고 불리는 식용 씨앗은 3000년의 재배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신진대사 촉진, 불면증 치료, 이뇨 등에 약효가 있어 왕의 진상품으로 쓰였고, 워낙 단단해서 염주를 만드는 데 쓰이기도 했다. 뿌리줄기(rhizome) 형태로 자라며 늦가을 무렵 비대해지는 연근은 조림이나 튀김 등 식품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지사제나 건위제, 혈액순환 개선, 지혈, 항염증 등의 약재로도 사용된다. 또한 빈혈 예방과 항산화 활성에 좋은 연잎은 잘 말린 다음 가루를 내어 차로 마시거나 요리에 넣어 먹기도 하고, 특유의 발수 효과 때문에 고기나 생선, 밥을 감싸는 포장재로도 활용도가 높다. 불교의 상징으로서 지니는 가치는 차치하더라도 연꽃으로부터 배울 점이 참 많다.
더러운 곳에서도 깨끗함을 잃지 않으며 살아 있는 동안 모든 것을 아름답게 내어 주고 타임캡슐 같은 작은 씨앗 속에 자신의 유전자를 담아 다시 수천 년의 삶을 준비하는 모습은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진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실장
■ 연꽃(Nelumbo nucifera)
인도,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지역 원산으로 주로 얕은 연못에서 자란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길게 뻗으며 자라 금세 빽빽한 연밭을 형성한다. 관상용으로 즐길 때는 3∼5월 사이 커다란 화분이나 작은 연못에 양분이 풍부한 진흙을 넣고 연근을 식재해 기른다. 최소 30㎝ 이상 수심이어야 하고 생육 기간엔 주간 25도 전후의 온도가 필요하다. 연꽃 씨앗을 싹틔우려면 줄톱으로 단단한 껍질을 깐 후 파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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