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뒤덮은 '횡재세' 물결…"제약사·식품기업까지 예외 없어"
유럽에서 ‘횡재세(windfall tax)’ 도입 물결이 거세지고 있다. 대형 은행과 에너지 기업뿐 아니라 보험, 제약, 식품 등 광범위한 분야의 기업들이 부과 대상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생활비 위기와 재정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4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KPMG와 미국 조세재단(Tax Foundation) 자료를 인용, 지난해 초 이후 현재까지 유럽 전역에서 횡재세가 도입되거나 제안된 사례가 30개를 넘는다고 보도했다.
국가별로 보면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24개국이 자국 에너지 기업에 횡재세를 부과했거나 부과할 계획을 밝혔다. 체코, 리투아니아, 스페인, 이탈리아 등은 은행도 표적으로 삼았다. 가장 최근 사례로는 이탈리아 정부가 은행들에 40% 세율의 일회성 세금을 물리겠다고 발표하자 유럽 증시가 한꺼번에 휘청이는 일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막대한 실적을 올린 에너지 기업에 ‘연대 책임’을 지게 한 이 조치는 애초 올해 12월까지만 시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슬로바키아, 헝가리, 체코 등이 2024~2025년까지 시한을 늘렸고, 영국은 2028년 3월로 종료 시한을 5년이나 미뤘다.
최근 들어서는 적용 범위도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헝가리는 보험사를 포함한 모든 금융 기관과 제약사들을 횡재세 부과 리스트에 올렸다. 포르투갈은 지난해와 올해 초과 이익을 거둔 식품 유통업체로부터 33%의 세금을 걷겠다고 발표했다. 전방위적 징세에 나선 국가들도 있다. 크로아티아는 2022년 기준 3억쿠나(약 580억원) 이상의 수익을 낸 모든 기업에 ‘추가이익세(Extra Profit Tax)’를 물릴 예정이다. 불가리아 역시 올해 7~12월 추가 이익을 낸 기업에 업종 불문 33%의 세금을 부과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유럽 정부들이 인플레이션에 따른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횡재세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일종의 ‘정책 실패’이자, 기업들의 신규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다.
KPMG에서 글로벌 조세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그랜트 워델-존슨은 “금리 상승과 (팬데믹 대응에 따른) 정부 지출 증가로 부족해진 세입을 메우기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 크리스티나 에나케 조세재단 이코노미스트는 “정상적인 과세표준 없이 특정 산업을 징벌적으로 겨냥한 조치”라며 “국내 산업 육성엔 불이익”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조세 정의’를 주장하는 사회단체들은 전력, 식량 등 필수품 가격 급등으로 다수가 생활고를 겪고 있는 상황에선 옳은 일이라고 주장한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의 크리스티앙 할럼 조세 정의 정책 책임자는 “수백만 명이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많은 기업이 기록적인 수익을 올리는 건 공정하지 않다”며 “횡재세는 직관적으로 공정하다”고 강조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재정 담당 부국장인 샤픽 헤버스는 “사후적으로 일회성 세금을 물리는 것보다 영구적인 시스템으로 정착시키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횡재세가 일시적으로 유용한 재정 정책일 순 있지만, 남용 시 폐해가 크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KPMG의 워델-존슨 책임자는 “팬데믹은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냈다”며 “이런 환경에서 횡재세는 매력적이지만, 산업 전반에 적용한다면 경제적 피해가 클 것”이라고 했다.
유럽에서 처음 횡재세가 시행된 건 1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15년 덴마트는 전쟁 기간 독일과 무역을 지속했던 식품 수출 업체들에 독일 전통 수프의 이름을 딴 ‘굴라쉬세’를 도입했다. 당시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최소 22개국이 전쟁 기간 초과 수익을 낸 기업들에 추가 세금을 물렸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때도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 재현됐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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