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아르헨 예비선거…투표소 앞에서도 "누굴 찍을지 모르겠다"
장총 들고 투표함 지키는 군인…반려견 데리고 투표소 온 유권자 눈길
10월 대선·총선 앞두고 실시하는 국민의무 투표…'대선 풍향계' 주목
(부에노스아이레스=연합뉴스) 김선정 통신원 = "투표장을 잘못 와서 돌아가야 하는데 누굴 뽑을지 모르겠어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형적인 중상층 거주지인 레콜레타의 투표장에서 나오는 마르티나(18)에게 누구에게 한 표를 행사했냐는 질문에 엉뚱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가야 하는 투표장은 300m 떨어진 곳이고 그곳으로 향해야 하는데 누굴 뽑을지 아직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의 옆에 있던,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이냐키(18)도 대체 누굴 뽑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이냐키는 선거에는 관심도 없고, 후보들에 관해 일부러 찾아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 그는 현재 경제 위기인 아르헨티나 상황을 감안했을 때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이 워낙 크기 때문에 혜성처럼 나타난 극우파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에게 관심은 있지만 그의 경제정책에는 반대한다고 했다.
의대생인 마르티나는 이냐키의 말에 동의하지만, 아무래도 현 경제 장관인 중도좌파 세르히오 마사에 마음이 약간 간다고 했다. 하지만 둘 다 지금까지도 누구에게 투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너털웃음을 보였다.
아르헨티나에선 13일(현지시간) 예비선거(PASO)가 치러졌다. 이는 Primarias, Abiertas, Simultaneas y Obligatorias를 줄인 말로 대선 및 총선 전에 실시되는 첫 번째 선거를 말한다.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열린 선거로 같은 날 동시에 실시되며, 만 18세 국민은 의무적으로 참여를 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당의 당원이 각 정당의 후보에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투표에 참여함에 따라 1.5% 이상 투표를 얻은 후보들만 본선에 참여할 수 있다.
특히 대선의 경우 지금까지 예비선거의 결과가 본선에서 뒤집어진 사례가 없기 때문에 대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선거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예비선거의 경우 연 115%를 상회하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 유권자들은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겹쳐 투표하러 가지 않겠다거나 기권표를 행사하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따라 이번 예비선거 참여율이 예년보다 매우 저조할 것으로 전망되기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시는 시장 및 시의원, 구청장 선거에 전자투표를 도입했는데 TN 방송은 오후 5시까지 총 240대의 기계가 작동하지 않았으며, 투표 시간을 1시간 앞두고 61.5%만 투표를 마쳤다고 보도했다.
야당의 유력한 예비 대선후보 중 한 명인 파트리시아 불리치 후보는 기계 오작동으로 7번이나 투표를 시도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처럼 기계 오작동으로 인해 투표가 지연되면서 유권자들이 긴 줄을 형성하자 투표 시간을 늘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일었다.
결국 당국은 투표 마감 시간인 오후 6시 이전에 투표장에 도착한 유권자들에 대해선 오후 7시 30분까지 기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투표장 분위기는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달랐다.
가장 특이한 점은 반려견과 같이 줄을 선 유권자와 장총을 메고 투표장을 순회하는 군인의 모습이었다.
레콜레타 지역의 사립학교에 마련된 투표장에선 반려견과 같이 와서 줄을 서 있는 유권자가 몇 명 보였다.
각 교실에 투표소를 준비하고 여러 투표소에서 동시에 투표를 진행하는데, 임산부, 거동이 불편한 환우나 어르신, 시각장애자를 배려해 별도의 투표소를 준비한 것도 눈에 띄었다.
장총을 든 군인에게 투표장에서의 임무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니 투표함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군인들에게 시민들은 스스럼없이 다가가 학교 내 어느 투표장으로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보아 군인들이 친절한 호텔 리셉셔니스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빨간 모자를 쓴, 전직 교사 출신인 닐다(83)에게 누구에게 투표했냐고 질문하니 "몇 시부터 그걸 밝혀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웃으면서 "나는 변화를 원했기 때문에 야당을 찍었다"고 말했다.
투표장에서 나온 아드리안(40)은 "난 여당을 찍었다. 아르헨티나 역사를 보면 우파, 중도우파가 정권을 잡으면 언제나 나라를 망쳤고 페론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그나마 경제가 핀다. 현 정권의 경제위기는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정권이 남긴 국제통화기금(IMF)의 말도 안 되는 외채 때문이다"라며 빠른 속도로 답변을 쏟아내더니 재빨리 자리를 떴다.
이어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지역에 위치한 투표소를 찾았다.
이곳의 분위기도 레콜레타 지역의 투표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시민권자의 줄은 투표 대기자로 장사진을 이뤘으나, 시장과 시의원 및 구청장만 투표할 수 있는 외국인 투표소는 한가했다.
외국인 투표소는 투표할 사람이 적어서인지 여러 질문에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사진 촬영에도 협조적이었다. 단, 투표 후에 프린트된 투표용지 사진은 찍을 수 없다고 했다.
유권자 명단에 한국인 이름이 보여 혹시 한국인 유권자를 볼 수 있을까 기대했으나 이런 기대감은 금방 사라졌다.
홍보가 안 된 것인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것인지 별도의 교실에 마련된 외국인 투표소에는 사람이 없었다.
투표장으로 사용된 학교 내 다른 교실엔 시민권자들의 줄이 한없이 길어서 투표까지 2~3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솔솔 나오는 상황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여론조사마저 갈피를 잡지 못한 이번 예비선거 결과는 오는 10월에 있을 대선과 총선을 대비해 국민들의 차기 대선에 대한 여론을 분석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특히 상당수 젊은이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극우파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가 얼마나 많은 표를 얻었는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sunniek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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