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기] 죽음의 순간을 미리 고민하는 사람들

오응석 충남대병원 신경과 교수 2023. 8. 1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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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응석 충남대병원 신경과 교수

지난달 10일 공중파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배우 오연수, 손지창 부부가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하는 장면이 방영됐다. 건강관리에 철저한 것으로 소문난 그들이 건강검진 후 찾아간 곳이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었기에 뜻밖이란 생각이 들었다.

배우 오연수는 훗날 자신이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가 어렵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을 경우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사용 등의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겠다는 사인을 하며,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될 때 자녀들에게 짐을 떠넘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그녀의 단호한 발언에 공감하는 시청자도 있는 반면, '건강한 50대 부부가 왜 벌써?'라거나 '굳이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는 일일까'하는 의구심을 품은 사람도 없지 않았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중환자의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조건과 절차를 다룬 법률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2018년 2월 4일이다. 그렇다 보니 '연명의료결정제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텐데, 프로그램이 전파를 탄 뒤 한동안 온라인에서 이슈가 되기도 한 모양이다. 90년대생들도 미리 작성하러 오는 경우가 있다는 방송 내용을 보고 남의 일처럼 여겼던 임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의료기관이 아니라 가벼운 관찰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죽음을 인식할 기회를 만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 생각되었다.

TV 방송을 보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외에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등록기관들을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다. 대전에서는 충남대병원, 가톨릭대 대전성모병원 등 일부 의료기관에서도 작성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언제부터 고민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준비해야 할까? 그에 대한 모범답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있는 내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가까운 사람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러 간다고 한다면, 무슨 말을 먼저 꺼내면 좋을지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죽음은 그렇게 무겁고, 어려운 문제다. 누구나 죽음보다는 삶을 더 오래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필자의 할머니는 칠순을 넘기고부터 죽음을 준비하셨다. 할머니가 다니시던 성당에서 주선해 준 사진관이 있다고 하시며, 혼자 영정사진을 찍고 오셨다. 액자에 고이 넣어 집으로 가져온 영정사진은 그 후 30년이 넘게 할머니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윤달에 수의를 맞춰두면 장수한다는 옛말이 있더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시기도 했다. 값비싼 수의까지 구입해두진 않으셨지만, 할머니는 103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영정사진을 찍고, 추모 공원에 한 자리를 계약하고, 죽음을 일찌감치 준비하신 것에 비해 꽤 장수하신 셈이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면, 죽음을 오래 대비하신 것만큼 건강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다. 건강에 해가 되는 음식은 일절 피하는 식습관을 가지셨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일상을 유지하셨다. 임종에 대한 준비가 할머니에게는 삶에 대한 애착과 다르지 않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죽음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보다는 죽음을 차분히 상상해 본 사람이 삶을 더 충실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죽음을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죽음의 순간을 예비하는 일이란 하기 싫어서 미루고 또 미루는 숙제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기왕에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시간에 쫓겨서, 상황에 내몰려서 하기보다는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하고 싶다. 가족이나 지인들에 의한 결정이 아닌, 내 의지대로 원만하게 결정할 수 있는 과정이면 좋겠다. 지나간 삶을 돌아보면서, 또 남아있는 미래를 더 꼼꼼하게 계획하며, 그런 고요한 시간을 조만간 가져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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