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흑돌과 백돌의 디스토피아…'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메타포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영화 내용을 알 수 있는 상세한 정보가 포함돼 있습니다)
황궁 아파트 입주민은 투표를 한다. 대지진 발생 후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건물인 이 아파트로 외부인이 유입되면서 혼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 외부인과 함께 살 것인가, 그들을 몰아낼 것인가. 결론은 다수결로 정해질 것이다. 부녀회장은 투표 방식을 설명한다. "외부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흑돌, 원하지 않는다면 백돌을 넣어라." 결과는 백돌의 압승. 황궁 아파트 입주민은 외부인을 몰아내기로 결의하고 그들을 단지 밖으로 모두 내쫓는 데 성공한다.
◇흑돌과 백돌, 바둑돌 투표의 피아 구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벌어지는 첫 번째 사건, 다시 말해 갈등의 단초가 되는 게 바로 이 투표다. 그런데 잠깐. 이 투표 어딘가 어색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방식이 아니다. 찬반을 결정할 땐 보통 OX로 표기하거나 두 개 안(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는 칸을 양분 해놓고 한 곳에 정해진 방식으로 표기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영화에선 바둑돌로 투표한다. 바둑이 뭔가. 흑돌과 백돌이 집을 놓고 싸우는 게임. 흑백은 피아 구분이다. 둘은 절대 같은 편이 될 수 없다. 말하자면 바둑돌 투표는 외부인을 아파트에서 내몬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부터는 외부인을 적으로 상정하고, 적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는 절멸할 수도 있다는 의지 표현이다.
◇백돌주의의 탄생
이 이분법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거는 게 바로 주민 대표 김영탁(이병헌)이다. 얼떨결에 대표가 된 그는 몸을 내던져 황궁 아파트를 외부인에게서 지켜낸 뒤 입주민의 신뢰를 확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김영탁은 백돌의 기수이자 백돌의 상징. 그는 아파트를 외부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결성된 방범대원들을 이끌고 아파트 외부로 나가 식량을 구해오는 데 성공한다. 김영탁의 이분법, 이를테면 김영탁의 백돌주의가 작동하며 성과를 낸 것이다. 환희에 찬 입주민이 잔치를 벌일 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제 전격적인 도약을 시도한다. 김영탁의 과거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정체를 알 수도 있는 새로운 입주민을 정확히 이 시점에서 투입시킨다.
◇김영탁은 회색돌?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영탁은 흑(외부인)도 백(입주민)도 아니다. 김영탁의 실제 이름은 모세범. 모세범은 902호에 살던 김영탁 행세를 하며 입주민인 척하고 있다. 여기서 모세범과 그의 가족이 황궁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으나 김영탁에게 부동산 사기를 당해 그러지 못했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그가 입주민이 아닌 건 분명하다. 그러나 외부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는 황궁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한 돈을 모두 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회색돌. 모세범이 돈을 달라고 하자 김영탁은 말한다. "내 집에서 나가." 흑백을 명확히 구분하며 자신을 백으로 모세범을 흑으로 규정하려는 김영탁에게 모세범은 분노하고,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던 중 김영탁이 죽는다. 바둑판에 머리를 부딪혀서. 이성을 잃은 모세범은 김영탁의 입에 바둑알을 마구 집어넣고, 바둑알 통으로 그를 수차례 내리친다.
◇백돌이라는 기준
이런 모세범이 주민을 대표하게 됐다는 건 결정적 상징이다. 사실은 이곳 주민 대부분이 모세범(회색돌)이라는 얘기다. 누가 백돌이고 누가 흑돌인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흑과 백을 가르는 그 애매한 기준점을 놓치지 않고 짚어낸다. 입주민들이 부녀회장 집에 모여 회의를 할 때 한 남성이 말한다. "자가인지, 전세인지 따져봐야 하지 않느냐." 전세로 살고 있는 이들은 흑인가 백인가. 반대로 살지는 않지만 집을 보유하기만 한 사람은 백돌인가 흑돌인가. 김민성(박서준)은 말한다. "은행 빚이 대부분이긴 하나 내 집은 내 집이다." 대출 비중이 큰 집에 살고 있는 이들은 백돌이 될 수 있나. 대출이 아예 없는 사람만 백돌로 부르는 건 정당한 규정인가. 내쫓긴 경비원은 절규한다. "내가 여기서 20년을 일했어!" 그렇다면 이 경비원은 흑돌이기만 한 것인가.
◇"다 나가!"
어쨌든 집은 한정돼 있다. 마치 바둑판이 가로·세로 딱 19줄로 이뤄진 것처럼 말이다. 앞날은 불확실하다. 각자의 사정을 일일이 헤아려 가며 생존을 도모하기엔 시간이 없다. 회색돌들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백돌 행세를 하며 흑돌을 축출하는 게 가장 간편한 방법이다. 부동산 공화국, 아파트 공화국에서 살아온 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집이 없는 설움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모세범은 김영탁에게 당하며 그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외부인의 격렬한 저항에 잠시 당황하던 그는 살아남으려면 김영탁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모세범은 자신을 내쫓으며 김영탁이 했던 말을 흑돌들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다 나가."
◇반목, 폭로, 습격
흑백논리로 구축된 황궁 아파트 시스템은 회색 지대를 허용하지 않는 그 극단적 방식 탓에 자멸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시스템은 연대가 아닌 절멸에 기반한다. 끊임없이 외부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 대결은 극단적 양상으로 흐르며 백돌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남긴다. 피해가 누적될수록 김영탁의 백돌 체제에 대한 내부의 반발 역시 커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클라이맥스는 모세범이 백돌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바로 그 대목. 이 시퀀스에선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 세 가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황궁 아파트 시스템의 두 축이었던 모세범과 부녀회장의 반목, 모세범 체제에 반감을 가진 명화(박보영)에 의한 모세범 정체 폭로, 외부인의 습격. 그렇게 황궁 아파트의 백돌주의는 붕괴된다.
◇김영탁이 돼버린 김영탁
이 지점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건 모세범과 김영탁의 다툼이다. 집을 둘러싼 두 사람의 대립, 바둑판과 바둑돌이 있던 바로 그 몸싸움은 훗날 황궁 아파트를 두고 벌어질 일련의 사건들에 관한 예언이나 다름 없었다. 김영탁을 죽이고 김영탁이 됐던 모세범은 김영탁의 행태를 똑같이 반복하다가 또 다른 모세범들에게 살해당한다. 정체가 탄로난 모세범은 주민들을 향해 자신의 억울함을 강력하게 호소하다가 구역질을 하고 만다. 아마도 모세범은 자신이 혐오하던 유형의 인간이 돼 있는 자기 모습을 본 뒤 이 분열적 상황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는지도 모른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황궁 아파트에서 도망친 명화는 아파트 외부 또 다른 생존 주민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명화는 묻는다. "저 여기 있어도 돼요?" 이 질문은 이 커뮤니티가 흑돌(외부인)도 받아주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자 한 여성이 답한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이 답변은 이곳은 흑돌도 백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쩌면 명화가 당도한 이곳은 최소한 황궁 아파트보다는 나은 곳, 아주 작긴 하지만 희망이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다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미래를 쉽게 긍정하지 않는다. 한 남성이 명화에게 묻는다. "그 아파트에선 사람을 잡아먹는다면서요? 거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이 질문은 황궁 아파트 사람들을 연대할 수 없는 이들로 규정하는 일종의 흑백 논리. 이에 한 여성이 핀잔한다. "쓸 데 없는 말 하지마." 김영탁과 황궁 아파트의 흑백 논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언제라도 밖으로 기어나오기 위해 대기 중이다. 그래서 명화는 아파트 사람들이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이었다고 답한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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