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회 영농수기 가작] 한알의 씨앗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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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진단을 받은 날, 1983㎡(600평) 고추밭에 퇴비를 뿌렸다.
수술 날짜가 4월 중순이라 늦서리에 약한 모종들은 5월초 입하가 지나야만 밭으로 나간다.
비가 자주 와 입원 전날에야 채소밭에 출동할 수 있었다.
분명 어제와 다른 날이지만 어제와 똑같은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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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진단 받은날 고추밭 퇴비 뿌려
농번기 ‘발등의 불’ 꺼야했기 때문
대파·양파도 수술 전 손수 심기로
직접 키우는 설렘 놓치고 싶지않아
위암 진단을 받은 날, 600평(1983㎡) 고추밭에 퇴비를 뿌렸다. 머릿속이 하얬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 했지만 슬픈 것은 아니었다. 삽을 든 몸이 휘청거릴 때마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건강검진은 빼놓지 않았어도 평소 병원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아프면 참던 습관이 가져온 참사인가 돌아볼 새도 없이 정밀검사를 하고 수술 날짜가 정해지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미 농번기가 시작되었으니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할 것이다.
한 뼘 치 자란 완두밭에 비료부터 쳤다. 비 예보가 있어야 치던 그간의 습관을 깨고 남편에게 동력분무기로 물을 대도록 했다. 꼬물꼬물 넝쿨손을 내미는 어린 완두들이 뜨거운 봄볕 아래 독한 비료 기로 탈이 날까 봐서다. 조직검사 기간 내내 예민했던 남편은 ‘악성 위암’이란 통보를 받고 터진 풍선처럼 맥이 빠져 순한 양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비 올 때 뿌리지 일거리 만든다고 타박했을 텐데 곧바로 물 대러 나간다.
동력분무기는 스프링클러가 아니라서 종일 호스를 들고 비료 준 구멍에 물이 흘러들게 해야 한다. 귀농 후 경운기 살 기회가 있었으나 경운기 공포증을 극복 못 한 남편이 선택한 게 동력분무기였다. 불편하고 기능이 적어도 자신이 잘 다룰 수 있는 기계가 낫다며 직접 손보고 사용해 온 지도 어언 13년이다. 분무기뿐이랴. 중고 관리기 사놓고 농번기 절반은 수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고생하면서도 이제 길 나기 시작한다고 애정 뿜뿜이다. 대파와 양파를 정식할 채소밭 조성이 급해졌다. 여유롭게 만들어 가꾸던 채소밭인데 일주일의 부재가 가져올 일의 정체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밭만 만들어 줘. 다른 건 몰라도 대파·양파는 내 손으로 심고 수술받게”
“나중에 내가 천천히 하면 되지 꼭 당신이 하려는 이유가 뭐야?”
“모든 작물엔 시기가 있어. 나 퇴원 후에 당신이 심기엔 너무 늦지. 그땐 고추를 심어야 하고. 채소밭 들어갈 시간이 없을걸.”
말은 그리했지만 무엇보다 내 손으로 정식하고 싶었다. 어느 해와 똑같이 새해의 설렘으로 씨앗 한 알씩 포트에 심어 키운 작물들이다. 해마다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2월이면 심고 싶은 채소 씨를 마당의 작은 비닐하우스에서 열선을 깔고 보온 덮개를 덮어 키운다. 한 해 농사는 눈이 내리고 얼음이 풀리기 전 2월부터 시작이다.
파종의 재미는 움트는 새싹을 만나 정점을 찍는다. 여리고 작은 싹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것을 보는 기쁨과 환희는 자식을 키우는 부모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씨앗 하나가 울창한 그들만의 초록 세상을 이루는 과정이야말로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다.
내 손으로 대파, 양파, 상추, 양배추까지만 심을 수 있다. 수술 날짜가 4월 중순이라 늦서리에 약한 모종들은 5월 초 입하가 지나야만 밭으로 나간다. 비가 자주 와 입원 전날에야 채소밭에 출동할 수 있었다. 작년 가을 심어 놓은 마늘이 새파랗게 손을 흔들며 어서 오라고 환영해 준다. 마늘 이파리가 내 몸속에 도사린 암 덩이를 쫓아줄 듯 힘차게 팔을 내젓고 있었다.
“아유~ 이뻐라~ 마늘아, 쑥쑥 커 다오~.”
골짜기 멀리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내 호들갑에 건너편 산에서 꿩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낮게 날아가는 꿩의 둔중한 뒷모습을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며 웃었다. 참으로 평화롭고 한가로운 날이었다. 분명 어제와 다른 날이지만 어제와 똑같은 날이기도 하다. 들고 나간 양파 모종을 둘이 열심히 심고 있는데 이웃집 언니가 도와준다고 달려왔다.
“경자 씨, 이제 이런 일 하면 안 돼! 아픈 사람이 몸부터 챙겨야지 무슨 농사일이야. 못 심으면 사 먹어도 되잖아.”
“키운 모종들 죽이고 어떻게 사 먹어요. 심어 놓기만 하면 먹을 만큼 클 텐데요.”
안 그래도 한 해 농사 포기하라는 지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농사보다 사람이 중하다 했다. 그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고 남편은 내 마음을 이해해 줬다. 어쩌면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들도 알 것이다. 3개월이다. 없던 정도 생길 시간이다. 거기엔 1년 전과 1년 후도 포함된다. 내가 직접 먹은 채소와 과일에서 채취한 씨앗들이고, 거금을 들여 사들인 고추씨였다. 어찌 시작도 해보지 않고 포기를 먼저 하라는 말인지!
처음 귀농하여 어설프던 초보 시절엔 이웃이 심고 남은 각종 모종을 얻어다 심었다. 비닐하우스가 없던 시절엔 이웃의 하우스에서 대신 키워주면 감지덕지했다. 그 시절에도 씨앗 한 알과 모종 한 포기의 위세는 상당히 컸다. 그러다가 나만의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내가 무엇을 심어 얼마만큼 키우는지에 이웃이 관심을 두자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자랑스럽고 뿌듯한 날들은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헌데 애써 키운 모종을 건강 문제로 포기를 한다면 아프지 말라고 응원해주던 이웃이 손가락질할 것 같았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러하셨듯이 농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농부라, 마지막 순간마저 농사일해야 한다고 억지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을 그들은 알까. 자부심이나 자존심이 아닌 이것은 내 존재에 대한 이해고 사랑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들의 존재 역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의 노력은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행해지는 욕망과 충동으로 나타나며 어떤 인간이든 욕망과 충동이 있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최선을 다한 삶에서 내 가족과 지인들에게 필요하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아파서 골골대며 주변에 민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를 걱정해 주는 그들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지름이 3센티 된다는 암세포를 떼어내고 완치 후에 ‘그땐 그랬었네’ 라고 말할 기회가 주어지길 바랄뿐이다.
거리마다 벚꽃이 화사하던 날 입원을 하였다. 얼마나 눈부신지 영월에서 원주로 가는 동안 창밖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다시 건강한 몸으로 꽃길을 달려 돌아가야지 다짐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꾹꾹 눌러 담았는데, 일주일 후 퇴원할 때는 벚꽃이 다 지고 없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계속 비바람이 불었다 한다. 위 전체 절제술을 받고 돌아오는 길은 위를 잃은 배 속만큼 허전했지만 집으로 간다는 생각에 마음은 입원하던 날보다 더 가벼웠다.
다음날부터 폭풍 같은 나날이 집 안팎으로 휘몰아쳤다. 나는 복대 속 흉터의 통증과 덤핑증후군에 시달렸고, 남편은 내 식사를 챙겨 놓고 혼자 밭으로 뛰어다니느라 각자의 자리에서 사투를 벌였다. 둘이 빠릿빠릿 뛰어야 해 낼 농사일을 벌여놓고 수술대에 오른 나로 인해 남편은 얼마나 아득했을까.
고추 모를 심던 날들은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두 사람 몫을 혼자 하면 일의 능률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게 아니라 3분의 1로 확 줄어든다. 예년 같으면 함께 요기하고 내가 간식을 챙기며 일복으로 갈아입는 동안, 남편은 농기계를 트럭에 싣고 나가 밭에 설치하고 돌아왔다. 내가 고추 모종에 진딧물 약을 치고 물을 주면 남편이 차에 싣고 함께 밭으로 가는 것이다. 두 사람이 최대한 동선을 줄여 타이밍을 맞추면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 과정을 오롯이 도맡은 남편은 일의 순서조차 잡지 못하고 헤맸다. 헝클어진 실타래는 남편을 더 고단하게 했을 것이다.
평생 안 하던 청소와 빨래, 내가 종일 먹을 환자식을 만들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면 지쳐서 정작 자신은 입맛을 잃고 김치 한 조각 얹어 국에 말아 먹기 일쑤였다. 따가운 봄볕에 땀 흘리며 바깥일에 매달릴 사람이 이리 먹어서 되냐고 잔소리하면 입맛이 없단다. 어느 날엔 김치마저 없는 식사를 깨작거리다가 내가 남긴 환자식을 허겁지겁 비우는 것을 봤다. 나는 죽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신이 그리 부실하게 먹는데 내가 잘 먹고 몸조리해서 건강 되찾으면 뭐 해? 다들 일할 때 혼자 집에 있는 것도 얼마나 불편한데….”
남편은 당뇨와 고혈압이 있어 평소 운동을 아주 열심히 해왔다. 농사일도 운동처럼 하면 힘들지 않다며 복식호흡에 대한 열변을 토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관리를 아주 잘해 왔었다. 내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수술받은 것도 남편의 영향력이 컸다. 남은 생애 남편과 즐겁게 살고자 함이다. 오늘의 식사가 내일의 건강으로 직결되는 중년이었다. 부부가 오순도순 늙어가며 서로의 손과 발이 되어주길 바라기에 통장의 잔액이 바닥인 걸 알면서도, 일 년 중 가장 바쁜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미루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투박한 손길로 기저귀를 갈아주고, 목욕시켜주고, 머리를 감겨주었을 때 나는 정말 눈물 나게 행복했다. 병원에서 남편이 나를 알뜰살뜰 보살펴주며 자기만 믿고 마음 편히 가지라고 해서 나는 그리했다. 온전히 몸과 마음을 그에게 맡겼는데, 정작 그는 자신에게 소홀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게 아니었기에 속이 상하고 슬펐다.
깜깜해진 뒤에야 녹초가 돼서 귀가한 남편이 음식을 차리도록 할 수 없었다. 펴지지 않는 허리였지만 살살 움직여 이웃집 언니가 해온 국을 데우고 나물을 꺼내 놓고 김치를 썰었다. 퇴원 후 스무날 만에 주방에 서 있었더니 일상으로 돌아온 듯 반갑다고 좋아한다. 3주가 석 달은 된 듯하다.
고추를 심느라 남편 혼자 애쓰는 게 딱해 보였던지 이웃들이 잠깐씩 들러 귀한 재능을 나눠주고 가셨다. 당신들도 바쁜 시간을 쪼개 한 시간, 두 시간 모를 넣어주거나 복토를 해주셨다. 울타리 칠 때 도와주러 오신 분도 계시고, 지지대 박을 때 날라주신 분도 계셨다. 이웃들의 귀한 보탬에 남편이 외롭지 않았겠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했다.
1차 항암 주사를 맞고 나는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1주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3, 4분 간격으로 끝없이 구토했는데 먹은 게 없으니 뭉텅뭉텅 올라오던 주먹만 한 이물질은 나중에 담당의에게 물어보니 소화액이란다. 길이가 장장 7m나 된다는 소장이 식도와 만나 위장의 역할을 하려니 버거운가 보았다. 소장의 반란, 덤핑증후군도 모자라 항암 약도 거부하며 꼬박 8일이 지나서야 물을 허락한다. 이번엔 물 마시고 토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럴수록 남편을 밖으로 내보냈다. 옆에서 내 고통을 지켜보는 게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밭에 가면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남편을 기다리며 망연자실했다. 그가 들어오면 음료수 반 컵만. 과일 한 조각만. 이 짧은 주문에도 반가워하던 그 역시 지치고 힘들어도 내색 한 번 안 한다. 잘 참고 견뎌서 내후년엔 함께 재미지게 농사일하자던 남편.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말로만 당연했고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던 창밖에서 뭔가 움직였다. 토하고 기운 빠질 때마다 생각 없이 내다보던 공책만한 창인데 뭐지? 하다가 깨달았다. 앵두였다. 앵두가 초록 이파리 사이에서 빨갛게 익어가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살랑살랑 부채질하는 앵두나무가지를 쳐다보면서도 멍하니 인식하지 못하는 나에게 나무는 잎을 들추어 붉은 앵두를 보여준다. 무엇에 홀린 듯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싱그러운 냄새가 코속을 파고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정리가 안 된 뒤란은 바로 뒷산으로 연결되어 산자락에서 뻗어 온 칡넝쿨과 머루넝쿨로 뒤엉켰다. 앵두나무 아래로 어수리가 활짝 피어 달덩이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환삼덩굴에 허리가 붙잡혀 있다. 십 년째 꽃을 안 피우는 사과나무 역시 머위 속에 묻힐 판이다. 그래, 너희들이 있었지. 문을 열면 내 손길을 기다리는 생명들이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밖으로 나갔다. 바깥 공기를 쐬자 몸의 세포가 성큼성큼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한여름 같은 불볕더위라며 연일 안전안내 문자가 날아오는 동안 남편은 완두 작업에 들어가고 나는 들깨 모를 부었다. 한 구에 두세 알 넣는 작업은 쉽지 않았으나 손가락 끝에 단단하게 잡히던 야무진 들깨 알의 감촉이 익숙했다. 이토록 작은 씨앗도 생명을 품고 보호하려고 두꺼운 껍질로 무장하고 있음이다. 그럼에도 솔솔 풍기는 고소한 향기란 얼마나 매력적인가.
백혈구 수치가 낮아 2차 항암치료가 한 달 후 7월로 미뤄졌다. 그 틈에 슬슬 밭을 둘러볼 수 있게 됐다. 감자꽃 피는 것도 보고, 쪽파종구와 마늘을 수확했다. 농작물을 둘러보는 즐거움과 거두는 뿌듯함은 어느 해보다 감격스러웠다. 오늘 저녁은 상추와 애호박으로 부침개를 만들리라. 남편이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흥이 난다.
길고양이들이 나무 그루터기 위에서 늘어지게 졸다가 밥 달라고 냥냥 거리는 오후의 햇살에 들깨의 떡잎이 피어났다. 마주 난 떡잎 두 장은 방금 깨어난 나비 같다. 그토록 작은 씨앗 속에 저런 앙증맞은 푸른 생명이 잠자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 알의 씨앗일지라도 함부로 내버릴 수 없는 이유다.
해가 갈수록 귀농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폭풍은 물러가지 않고 장마는 언제 그칠지 모르지만 오는 7월에도 나는 씨 뿌릴 생각에 가슴이 뛴다. 그날엔 위장이 있던 자리, 내 안의 깊은 늪 어딘가에 푸른 나비 훨훨 날아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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