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회 영농·생활 수기 우수작-청년부문] 못생긴 귤을 키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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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이제 얼굴도 제법 가맣게 타고 주근깨 잔뜩 낀 웬 농부가 하나 서 있나 싶은데 남들이 보기에는 아직도 서울에서 내려온 젊고 이상한 한의사인가 보다.
다들 젊은 사람이 농사짓는다고 하면 처음에는 신기해하다가 한의사라는 말을 들으면 황당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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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공부와 거리 멀었던 학생
갑자기 의사 될 거라며 고집부려
한의사 된 후 ‘이번엔 전업농’ 선언
넋나간 아버지 만류에도 제주도행
“왜 한의사같이 좋은 일을 그만두고, 농사같이 힘든 일을 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이제 얼굴도 제법 가맣게 타고 주근깨 잔뜩 낀 웬 농부가 하나 서 있나 싶은데 남들이 보기에는 아직도 서울에서 내려온 젊고 이상한 한의사인가보다. 다들 젊은 사람이 농사짓는다고 하면 처음에는 신기해하다가 한의사라는 말을 들으면 황당해한다. 이런 반응을 하도 많이 접하다 보니 “좋은 농산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좋은 식품 먹이면 그게 의사지~”라고 너스레를 떨긴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들을 보면 영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가장 먼저 황당해했던 분들은 역시 우리 부모님이다. “아버지, 나 제주도 내려가서 농사지을래요.” “아, 한의원 하면서 농사도 짓게? 좋지. 그게 다 공부고, 한의학이고 그런 거야.” “아니요, 전업 농부가 될 건데요.” 아들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얼이 나간 아버지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아들 때문에 평생 속 태우시며 살아오신 아버지는 또 시작이라는 듯이 만류하셨지만 항상 그렇듯 이번에도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넋 나간 표정을 처음 봤던 건 재수를 결정하면서였다. “아버지, 나 의사가 될래요.” 나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다. to 부정사나 be 동사도 모르던 내가 갑자기 의사가 된다고 하니 아버지는 “의사 되려면 얼마나 힘든지는 알지?”라며 우려하셨지만 그때도 아들 고집을 꺾지는 못하셨다.
어릴 때 공부와 거리가 멀었던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막노동 일을 해서 용돈을 벌곤 했는데 지방의 한 대학병원 식당 공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주 업무는 철거 작업이었고, 다른 일보다 두 배쯤 일당이 후한 곳이었다. 신나서 지원했지만 알고 보니노동강도는 두 배, 아니 몇 배는 더 심한 곳이었다. 현장에서 이른바 ‘함마’라고 부르는 해머 드릴을 이용해서 벽과 바닥을 부수고, 그 폐기물들을 나르는 일이었는데 병원 식당을 멈출 수는 없어서 주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일을 시작해서 아침 식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작업을 했다. 아무래도 기계로 벽을 부수는 작업이다 보니 작업 현장은 매우 시끄럽고 먼지가 계속 피어올라 앞도 잘 안 보였다. 흐린 시야 속에서 귀에 귀마개를 꽂고 눈앞의 벽만 하루 종일 부수다 보면 자꾸만 온갖 상념이 떠오르곤 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앞으로도 이렇게 벽을 부수고, 변기를 설치하고, 페인트를 칠하며 살아가게 되는 걸까?
그렇게 밤새 졸린 눈을 치켜뜨면서 벽들을 한참 부수다 보면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던 시간이 왔다. 퇴근 시간이다. 식당 공사여서 가장 좋았던 건 아침에 밥을 먹고 퇴근할 수 있다는 거였는데 심지어 밥이 꽤 맛있었다. “아저씨! 오늘 일 다 끝났어! 밥 먹고 퇴근해!” 조리사 아주머니의 이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2주쯤 식당 벽을 허물고 있을 때, 하루는 우연히 그곳의 학생들과 마주칠 일이 있었다. 다들 가운을 입고 있었고 얼굴을 보면 2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꽤 자주 오는 모양인지 매일 아침 내 퇴근을 알려주던 조리사 아주머니와 꽤 친해 보였다. “아이고, 선생님들 오늘도 맛있게 먹어요.” 별 뜻 없는 말이었겠지만 나는 그날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불리는구나, 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음에도 선생님이었고, 안전모에 목장갑을 낀 나는 아저씨구나. 심지어 저 사람들이 나보다 돈도 더 잘 벌겠지? 나도 의사가 되고 싶었다.
무작정 공부를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다. 워낙 기초가 부족해서 재수에 실패했다. 그리고 삼수, 사수도 실패했다. 결국 수능을 다섯 번이나 보고서야 겨우 한의대에 입학했다. 원래 목표였던 의대 진학에는 끝내 실패했지만 그래도 가운을 입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람은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값을 치르게 되어있구나. 내가 학창 시절에 공부를 안 해서 20대 초반을 수능으로 날린 거구나. 다시는 그 삶을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치열한 대학 생활을 보냈고 나름의 성과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많은 상을 받았고, 한의학 분야에서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한의사가 되고 나니 좋은 제안들도 많이 들어왔다. 인생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느꼈다. 돈 버는 방법도 열심히 공부해서 젊은 나이치고는 그래도 꽤 많은 재산도 형성했었다. 직업적으로도 코로나19 역학조사관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유명한 정치인들에게 이런저런 상들을 잔뜩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정말 반짝반짝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실제의 나는 속부터 썩고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잊은 지 오래였고 365일 중에 350일 이상은 일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거의 매일 야근은 당연한 일이었다. 친구들은 멀어졌고, 오래 사귀던 여자친구도 떠나갔다. 건강은 나빠졌고 일 말고는 사람들과 얘기 나누는 게 어려워질 때쯤 일들이 터졌다. ‘루나 사태’라고 불리는 블록체인 업계의 최대, 최악의 사건이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몇 년간 모았던 모든 재산을 날렸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슬프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뭔가 툭- 끊어진 느낌이었다. 오히려 안도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때의 나는 몇 년간 숫자에 매달려 있었다. 코로나19 환자 숫자는 적게 통장의 숫자는 많게. 수년간 나의 노력에도도 그 숫자들은 한순간 의미를 잃어버렸다. 코로나19 환자는 하루에 몇십만 명씩 터져 나왔고, 내 통장은 갑자기 텅 비어버렸다. ‘아 이제는 더 이상 이 숫자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며칠 후에 나는 역학조사관을 그만두고 제주도행 항공권을 끊었다. 2박 3일 계획이었는데 오랜만의 일상은 너무나 행복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항공권을 취소하고 제주에 남았다. 친구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청소일을 하면서 숙소비를 아꼈다. 2박 3일은 한 달이 되었고, 1년쯤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집을 알아보는데 처음으로 본 집에 귤밭이 딸려있단다. 마치 운명 같았다. 부동산 중개업자도 집주인도 처음에는 말렸다. 농사 만만한 거 아니라고, 그냥 다른 집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농사가 짓고 싶었다. 숫자가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며칠간 집주인을 설득해 결국 대여했고 그렇게 농사를 시작했다.
농사를 시작하고 알게 된 건데 귀농은 생각보다 어려운 얘기다. 다들 귀농 전에 몇 달이든 몇 년이든 귀농 교육을 받아서 내려오는 게 보통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가족이나 친척이 농업인이어서 지근거리에서 농사를 알려주고 같이 일하면서 비법을 전수해 주곤 했다. 하지만 나는 무작정 밭을 보고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내려왔고 호미 한 자루 없이 농사를 시작해야 했다. 밭을 얻은 다음 날 텅 빈 방에 누워 있다가 무작정 옆집 할머니를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저 여기 이사 왔어요.” “무사 젊은 아가 여 내려와부난?” “농사 좀 지어보려고요.” “미깡(귤)?” “네.”
할머니는 이 이상한 젊은 애는 뭐지? 라는 표정으로 역시나 “아니 한의사같이 좋은 직업 놔두고 뭐 한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한참 타박하시더니 우리 귤밭에 와서 이런저런 지식을 알려주셨다. 방제하는 방법과 잡초를 관리하는 방법, 그리고 귤의 당도를 올리는 방법 등이었다. 서울에 살 때는 제주 사람들은 다 귤을 키운다는 게 그저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서귀포에 살고 있는 지금은 그 말이 반쯤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서귀포 사람들은 절반 이상 귤나무를 키우고 있는 느낌이다. 어떤 자리에 가던 귤 농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수영을 배우러 가도 커피를 마시러 가도 밥을 먹으러 가도 귤 이야기다. 옆집 할머니에게서 실마리를 찾은 나는 이거다 싶었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귤 농사하는 분들께 말을 걸고 다니면서 농사 비결을 여쭤봤다. 재미있는 건 귤 농부 100명이 있으면 농법도 100개가 있다는 거다. 모든 분이 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자기 귤이 제일 맛있단다. 처음에는 이게 너무 헷갈렸다.
처음에는 농사 방법을 몰라서 탈이었는데 이제 너무 많이 알아서 탈이었다. 기껏 농사를 지어놓으면 다른 농부가 와서 다시 하라고 한다. 그래서 계속 논문이나 최신 연구를 검색해 가면서 옳은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생각보다 농사는 참 재미있었다. 한의대 다닐 때 배웠던 화학이나 약초 공부의 지식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알게 된 ‘귤’과 ‘농사’는 내 삶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귤껍질은 한의학에서 진피라는 약재로 쓰인다. 예전에는 정말 귀한 약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귤껍질이 다 버려지고 있다. 첫째는 이게 약인지 몰라서, 둘째는 알아도 많은 농약 때문에 쓸 수가 없어서다. 귤은 단 과일이라서 영양분이 많다. 그래서 벌레나 새, 온갖 것들이 달려드는데 이걸 보호하는 게 농사의 주된 목표다. 이를 위해서 주기적으로 살충제와 살균제를 뿌린다. 또 바닥의 잡초들이 자라나 나무를 타고 올라오지 않게 바닥에 제초제를 뿌린다. 이렇게 관리하면 귤껍질은 티 없이 예쁘게 자란다. 이래야 ‘상품’ 귤을 만들 수 있고 경매에서도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벌레나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화학약품들은 귤나무에도 스트레스를 주고 귤의 당도는 떨어진다. 내실보다는 겉껍질을 위한 농사를 짓는 셈이다.
지금 나는 친환경 농사를 공부하고 있다. 제초제와 농약을 아예 뿌리지 않는 무농약 농법을 시도 중이다. 화학 살충제, 살균제 대신 유채 기름을 뿌리고, 구리와 석회, 유황 등을 이용해 벌레를 쫓는다. 농약들에 비하면 그 효과가 적어서 어쩔 수 없이 귤들은 우둘투둘 못나진다. 상처도 많고 모양도 삐뚤빼뚤하다. 귤의 수확량도 줄고 잡초들 때문에 농사도 힘들다. 하지만 귤의 당도는 올라간다. 그리고 못났지만 껍질까지 먹을 수 있는 귤이다. 나는 이게 꼭 지금의 나 같다고 생각했다. 피부도 까맣게 타고, 매일 땀에 절어 일을 하다 보니 땀띠에 팔이며 다리에 긁힌 자국이 가득하다. 하루 종일 예초기를 매고 작업을 하는 날이면 온몸에 근육통이 배긴다. 예전에 비하면 정말 우둘투둘한 삶을 살고 있다.
그렇지만 행복하다. 하루 종일 땀을 흘려 일하고 맥주 한 캔 마시면 부러울 게 없다. 예전에는 늘 새벽까지 깨어 일을 했었는데 지금은 몸이 피곤하니 늦게까지 깨어있을 수도 없다.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든다. 농사는 혼자 할 수가 없어 주변 사람들과도 끈끈한 동지애가 생긴다. 책상에만 앉아있던 몸을 움직이니 건강도 좋아졌다. 농사는 땀을 흘린 만큼 결과를 보여주고 이건 숫자 따위가 아니다. 실제로 눈앞에서 커가는 과실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 겉은 우둘투둘해도 예전처럼 숫자를 위해서 살던 때보다 알차게 살고 있음을 느낀다.
여전히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왜 한의사같이 좋은 일을 그만두고, 농사같이 힘든 일을 해?” 나는 비록 겉모습은 좀 못났더라도 먹을 수 있는 나만의 진짜 껍질을 갖고 싶다. 엉망처럼 보이지만 그 안의 과실은 더없이 달콤한 그런 귤을 만들고 싶다. 이게 내가 농사를 짓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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