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회 영농·생활 수기 우수작-일반부문] 잘못된 만남

관리자 2023. 8. 14.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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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눈을 떴다.

깊게 잠을 청하지는 못하더라도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곤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다시 눈을 붙인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떠 확인한 시간은 다섯시 이십분.

언제 봐도 웃는 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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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부문 조윤수 (58·인천 강화군 강화읍)
1000평 밭에 고구마 순 심는 날
오전 다섯시부터 두 눈 번쩍 뜨여
지역 강소농 12기 막내 고총무 등
자율공동체 회원 6명 함께 농사
올봄 자율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정식한 고구마밭에서 작물 상태를 살펴보고 있는 조윤수씨.

번쩍! 눈을 떴다. 

무의식적으로 머리맡을 더듬는다. 휴대전화를 찾아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다섯 시. 

아직, 한 시간 넘게 여유가 있다. 깊게 잠을 청하지는 못하더라도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곤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다시 눈을 붙인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떠 확인한 시간은 다섯시 이십분. 겨우 이십분 지났지만 한 번 깬 잠은 다시 청하기 어려웠다. 약속에 늦지 않으려는 강박감도 있겠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의 무게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더 자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 같아 부지런을 떨며 외출 준비를 한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길을 나서는데 벌써 훤하게 동이 터 온다. 

오늘은 길상면에 있는 3300㎡(1000평) 밭에 고구마 순을 심는 날. 

목적지까지는 차로 삼십분 거리. 천천히 차를 몰아도 약속 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다.

열어 놓은 차창으로 바람이 불어와 얼굴에 부딪힌다. 상쾌하다. 이른 새벽, 밖에서 일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작은 행운, 혹은 감동 같은 것일 터.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기분 좋은 출발이다.

작업장에 도착하니 한재순 대표가 밭일을 하는 데에는 최적인 엉덩이 깔개를 두르며 후덕하게 인사를 건넨다. 한 대표는 인터넷 거래뿐만 아니라 강화 관내 농협의 로컬매장에 장류를 납품하는 여성 농업인이다. 그 어깨너머로 우리 강화도 강소농(强小農) 12기의 지존 같은 머슴 아닌 열혈 청년인 고 총무(고총은 올해 마흔아홉. 울 자율공동체의 자타공인 막내이다)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의 모습만 봐도 괜히 믿음이 가고 배시시 웃음이 나오는데, 부러 아랫배에 힘을 주고

“여∼ 고총! 굿 모닝이여.” 하고 인사를 건넨다.

“아이고 회장님, 어서 오시겨. 빨리 오셨시다”라며 응대한다. 언제봐도 웃는 낯이다. 고총무는 보는 이를 무장 해제시킴은 물론 자연스럽게 웃게 만드는 힘이 있는 천상 농부다. 그런 그도 불과 6년 전만 해도 번듯한 전기 회사의 부장님이었다. 딸을 셋 둔 그가 부장님 월급으로는 아이들 셋을 못 키우겠다는 생각이 들었더란다. 그의 아내와 오랜 상의 끝에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돌아와선 시간을 쪼개가며 농업기술센터의 교육이란 교육은 거의 다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농업에 대한 꿈을 키우고 가꾸더니 마침내 청년 후계농이 되었다. 강화에서 몇 안 되는 딸기 농사를 짓는 농부이기도 하다. 나는 안다. 그가 지금의 수입을 올리기까지 얼마만큼의 노력과 고통을 감내했다는 것을. 그러기에 그는 항상 웃는 낯이다. 그 모습에 딸기 역시 무럭무럭 자랄 수밖에 없었으리라. 

먼저 도착한 사람들끼리 인사를 건네며 오늘 심을 고구마밭이 넓다거니, 밭이 잘 쓸리지 않았다거니 주고받는 사이 석모도에 사는 장 대표, 교동도의 이 대표 등 강화도 각 지역의 회원들이 속속들이 도착한다. 마지막으로 이 박사까지 도착하니 여섯명. 마침내 완전체가 되었다. 이 박사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아는 게 많다. 농사든 뭐든 어떤 주제로의 이야기가 시작되든 백과사전급의 설을 풀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논문도 한 편 없이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그는 우리 자율 모임체에서 공동으로 경작하는 옥수수밭을 쓸린다든지 밤밭에 약을 칠 일이라도 생기면 솔선수범하는 것도 가위 박사급이다. 

우리 여섯은 강화도 강소농 12기에서 동문수학한 동기들이다. 교육을 마치고 서로 협업해서 농사를 짓기 위해 뜻을 모았다. 올해로 2년 차. 강화읍을 중심으로 봤을 때 동서남북으로 각각의 회원들이 터전을 이루고 있다. 지도상에서 선으로 이어보면 강화도를 구분하여 여행할 수 있는 하나의 동선이 형성된다. 강화도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정직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실속 있는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원대한 포부도 키워가고 있다. 작년 농업기술센터에서 시행한 강소농 교육을 마치고 결성한 ‘강화섬 톺아보기’는 철저하게 공동 노동, 공동 생산, 공동 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자율공동체이다. 말 그대로 완전 자율에 의해 움직이는 농부들의 소모임인데 각자의 농사는 농사대로 지으면서 공동으로 짓는 농사 역시, 유기농으로 짓고 있다. 

마침내 모든 회원이 모였기에 작업반장인 고총과 이 박사가 오늘의 업무량을 알려준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호스를 끌고 다니며 밭에 물을 대는 고총. 그러다가는 어느 순간엔 모종을 실어와 밭 여기저기에 가져다 놓는다. 했더니만 또 부르릉! 트럭의 시동을 건다.

새벽에 수확한 딸기를 인근 농협에 납품하러 가는 것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느새 손에 익은 작업에 탄력을 더했다. 하지만 아직 오월임에도 불구하고 열시 무렵의 해는 제법 뜨거웠다.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여기저기에서 쏟아진 농담 때문에 작업이 될까 싶었는데 어느새 부쩍 말수들이 줄어들었다. 힘든가 보다. 긴 이랑 한 줄을 심고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지만, 옆줄의 작업조와 본의 아니게 선의의 경쟁을 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그렇게 모두가 일에 열중한다. 그런데 불쑥

“고총에게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나 사 오라고 할걸”이라며

혼잣말인지 아니면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아쉬움을 흘려내는 이 박사.

아니다, 이미 샀을 것이다.

아녀 아녀, 바쁘기도 하고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런 건 생각지도 못할 것이라는 등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저기에서 나온다. 

이마저도 잠잠해지자 이 박사가 겪었던 농사에 관한 에피소드를 노동요 삼아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때로는 되묻기도 하면서 열심히 순을 심었더랬다. 

한편 우리가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곁에 나와 참견하고 싶으셨던 고총의 아버님. 

기어이 

“고구마 순은 비스듬히 심으니껴. 흙을 덮고 토닥토닥 두드리며 ‘잘 자라라’ 라고 말하니다”  라며 손수 시범을 보이신다. 느릿하면서 야무진 마무리. 농부의 전형적인 손길이지 싶다. 두 손 모으는 겸손함과 몸에 밴 간절함이 골 깊은 이마의 주름과 투박한 손마디를 통해 전해져온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에는 팥이 나듯

우리가 고구마순을 심은 자리 역시 고구마가 맺힐 것이다. 거기에 더해 우리들의 소박한 꿈과 희망도 오롯이 움트리라. 내 것보다 남의 것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기에 반드시 그러하리라.

시간이 갈수록 기온은 자꾸 올라가고 몸으로 느끼는 노동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졌다. 

그래서일까? 넓은 밭에 한동안의 정적이 흐른다.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한 대표. 

우리 공동체원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그녀가 

“아이고 허리야” 하며 허리를 붙잡고 일어서더니 느닷없이

"우리 만남은 잘못됐어!" 라고 외친다.

“너무 힘들어. 손주들 재롱 볼 나이에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야”를 푸념처럼 늘어놓는다. 

연이어 

“잘못된 만남이야, 잘못된 만남!!!”을 되뇌인다.

1년이 넘도록 꿈꾸며 가꿔온 우리의 프로젝트가 오월의 시뻘건 해가 내리쬐는 고구마밭에서 잘못된 만남으로 낙인이 찍히는 순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의 여성 듀엣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고구마순 심기에 열심이다. 

괜히 멋쩍은 내가 

“그늘에 가셔서 좀 쉬셔요”라고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잘못된 인연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연신 뭐라고 하면서도 재게 손을 놀리는 한 대표.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돌아앉은 그녀의 펑퍼짐한 등이 믿음직스럽다. 

이때다 싶었던지 이혜숙 대표의

“ 신청곡 나가유~”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전혀 예상치 못한 노래에 후렴이라도 따라 부르듯, 

“ 그래, 좋아!!”

“끝내 끝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든다. 

때마침 납품을 마친 고총이 돌아왔다. 방금 전의 분위기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좀 쉬었다 하시겨!” 하는 말과 함께 

“이 박사! 이것 좀 받아줘” 한다.

‘그러면 그렇지. 그냥 올 사람이 아니지’ 하며 허리를 펴 눈길을 보낸다. 

과연 고 총무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박사와 같이 날아온 푸짐한 간식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이슬 머금은 수박!!

간식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밭 가장자리의 손바닥만 한 감나무 그늘에 옹기종기 붙어 앉아 수박을 쪼개고 건네고 받는 사람들. 햇볕에 들뜬 몸에서 품어져 나오는 열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너나없이 잘 익은 수박을 한 입 크게 베어 문다. 단물과 함께 스며드는 시원함.

모두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새참의 강하고 선한 영향력에 은혜(?)받은 모습들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 대표님! 아니, 잘못된 만남이라면서요?” 했더니

“내가 언제??” 라며 완전히 오리발이다.

웃고 떠드는 사이, 이른 아침에 시작한 우리의 노동은 어느새 오후 한 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배도 고프고 힘들기도 하련만 하나같이 “저기까지만, 저기까지만!”을 외치며 결국 3300㎡(1000평) 밭에 고구마 순을 다 심었더랬다.

점심으로 시원한 메밀국수의 유혹이 강했으나 이열치열의 의미로 따끈따끈한 동.태.탕. 흡입. 끝내기가 바쁘게 다시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그렇게 우리 강소농 12기의 ‘잘못된 만남’이라는 플래시몹은 잔잔한 여운을 남기고 막을 내렸다.

여섯 명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대표로 있으면서도 서로를 위해 6인 6색으로 뭉친 강화섬 톺아보기 회원들. 이들과 함께하기에 농사가 더욱 해볼 만한 일이 되었다.

혼자 백평은 어려워도, 열명이 천 오백평은 너끈하게 짓고도 남겠다는 한 대표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자아, 이제 땅콩밭이다’ 창문을 내리고 기분 좋게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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