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왕의 DNA와 ‘특별한 우리아이’
지난 10일 교육부 공무원이 자녀의 초등학교 담임 교사에게 9가지 요구 사항을 적은 편지가 공개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최근 폭로된 학부모의 수없이 많은 ‘황당 민원’ 사례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세 왕들을 위해 남겼다는 ‘훈요 10조’를 패러디, 인터넷에서는 ‘훈요 9조’로도 불린다.
해당 공무원은 ‘아이가 경계성 지능 장애가 있어 치료기관의 지침을 전달했다’며 고개숙였다. 하지만 ‘왕의 DNA를 지닌 아이니 왕자처럼 대하라’ 등의 요구가 ‘자폐·ADHD 무약물 치료’에서 나온 지침이란 의혹은 여전하다. 유사 과학에 빠진 부모가 교사에게 진상을 부렸다는 주장이다. 사실이라면 약물 치료를 꺼리는 일부 부모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사이비 연구소, 아이가 개선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부모 모두에게 합당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놓쳐선 안 될 건 현장 초등학교 교사들의 반응이다. 많은 교사들은 이른바 ‘훈요 9조’에 기재된 요구 사항 태반이 “다수 학부모들이 교사에게 일상적으로 요구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교육부 공무원이 공적 메일로 교사를 압박한 상황, ‘극우뇌’ ‘왕의 DNA’ ‘왕자’ 등 편지에 사용된 특이한 용어가 없을 뿐 그 근간에 깔린 근본적인 메시지는 같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는 특별하니 그에 맞게 대우하라”는 이기주의 말이다.
교원 단체의 학부모 민원 사례 상당수가 ‘훈요 9조’와 닮은꼴이다. ‘우리 아이는 예민하니’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우리 아이는 예민하니’ 다른 아이에게 짜증을 내도 일단 공감해달라, 다른 아이 앞에서 칭찬하고 기를 세워달라, 다른 아이는 칭찬하지 말아달라, 급식에 고기 반찬을 꼭 넣어달라, 돋보이는 심부름을 시켜달라, 앞자리에 앉혀달라, 청각이 예민하니 음악 수업은 하지 말고 수업 중 큰 소리를 내지 말라 등…. 끝도 없다.
이상한 단어만 없을 뿐, ‘또래와 갈등이 생기면 철저히 편들어달라’ ‘부탁의 어조를 사용하라’ ‘싫다는 음식을 억지로 먹지 않게 하라’ ‘칭찬과 사과에 메말라 있다’는 훈요 9조 편지와 다를 바 없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단체 생활을 하며 낯설고 불편한 상황에 적응하고, 분노·좌절·부끄러움 같은 부정적 감정을 다스리고 회복하는 법을 배운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교사가 20명 이상의 아이를 맡는다는 현실도 무시한다. 아이와 학교 모두를 망치는 일이다.
‘왕의 DNA’와 같은 황당한 사례는 여론을 쉽게 움직이지만, 그만큼 진지한 자기 반성 없이 빠져나갈 틈도 준다. 문제가 ‘일부 특이한 진상’의 일인 양 손가락질하고 넘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실을 무너뜨리는 건 유사 과학에 빠진 사람,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 같은 특이한 사람에게 국한된 게 아니다. 학교 현장 모두가 입을 모아 “평범한 학부모 다수가 아이를 내세워 황당한 요구를 하고, 이게 문제인 줄도 모른다”고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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