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폭탄의 아버지’… 그는 모함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CG 없이 핵 개발 과정 묘사해 사실감↑
천재적 인물 사연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
대량살상무기 발명을 주도했다. 국가를 위해서였다. 전쟁 승리에 공헌했다. ‘핵폭탄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붙었다. 모든 미국인이 알아볼 명사가 됐다. 끝 모를 환호와 영예만 따를 듯한 삶. 하지만 인생은 예측대로 흐르지 않았다. 국가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로 낙인찍혔다. ‘지옥문’을 열었다는 자책에 시달리기도 했다.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삶은 영화 같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그 극적인 삶을 스크린에 온전히 구현해낸다.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를 축으로 전개된다.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2차세계대전 조기 종전을 이끌 핵폭탄 개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일어나는 일, 매카시즘 광풍 속 오펜하이머가 오래전 좌익 활동 때문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 사연이 맞물리며 180분이 흘러간다.
실험물리학은 낙제 수준이었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교수 독살 계획까지 꾸몄던 오펜하이머의 영국 유학 시절, 세계적 물리학자 닐스 보어(1885~1962),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 등과 교유했던 모습, 스페인내전 공화파를 후원하고 노동조합 활동에 열성이었던 캘리포니아공대 교수 시절, 남다른 지도력으로 핵폭탄 개발에 매진했던 맨해튼 프로젝트 활동, 공산주의자로 몰려 비공식청문회에서 수모를 당한 후 모든 공직에서 퇴진해야 했던 인생 후반 등이 여러 시공간을 오가며 펼쳐진다. 오펜하이머의 천재적인 면모에다 그의 복잡한 이성관계가 포개지고, 역사적인 순간들이 끼어든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나 혼란스럽지는 않다. 공 네다섯 개를 능숙히 저글링하는 노련한 곡예사 같은 연출력 덕이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남달랐던 삶을 인류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한다. 네덜란드어를 6주 만에 터득하고 이론물리학에 혜안을 지닌 오펜하이머도 인간적인 고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영웅 대접을 받다가 모함으로 곤경에 처하고 지인의 배반을 겪기도 한다. 정도만 다를 뿐 누구나 경험할 만한 일이다. 상승과 하락의 진폭이 큰 오펜하이머의 삶은 관객의 정서를 강하게 자극하다 종국엔 핵폭탄급 감정의 폭풍을 일으킨다. 나치독일이 핵폭탄을 먼저 개발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미국이 소련보다 수소폭탄을 앞서 만들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운 모습이 흥미롭기도 하다. 적개심보다 공포심이 가공할 살상무기를 만들어내고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터스텔라’(2014)와 ‘덩케르크’(2017) 등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이전 작품들처럼 사실감 넘치는 장면들로 스크린을 채운다(전작 ‘테넷’에서는 실제 보잉 747 여객기를 폭파시켰다). 핵폭탄 개발을 위해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 급조된 소도시, 인류 최초로 이루어진 핵폭탄 실험 등이 컴퓨터그래픽(CG)을 전혀 쓰지 않고 표현됐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아내 키티(에밀리 블런트)가 사는 걸로 나오는 집은 오펜하이머의 생가다. 맨해튼 프로젝트 때 건설돼 아직 남아있는 건물들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로케이션 촬영이든, 세트촬영이든 최대한 사실적이어야 관객들의 경험도 더 강렬해진다”는 놀런 감독의 지론이 반영됐다.
모든 장면이 아이맥스 필름으로 촬영됐다. 흑백 장면은 이 영화를 위해 개발한 65㎜ 흑백 아이맥스 필름을 사용했다. 광활한 로스앨러모스 벌판, 핵폭탄 실험으로 형성된 거대한 버섯구름 등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듯 사실적이다.
작가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공저한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005)를 바탕으로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다가 영원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이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종전을 위해 핵폭탄을 개발했으나 더 끔찍한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오펜하이머의 처지를 은유한다.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을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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