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촌 브롱크스가 세계를 장악했다… 뉴욕 ‘힙합 50주년’ 열풍
“드롭 더 비트(Drop the beat·비트 주세요)!” 지난 9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의 공연 시설인 링컨센터 야외 무대가 비트(쿵쾅거리는 리듬)로 들썩였다. 챙을 구부리지 않은 파란 야구모자에 분홍 형광색 바지를 입은 유명 힙합 아티스트 트윗부기(TweetBoogie)가 들썩이며 마이크를 흔들자 디제이 고 비지(DJ ‘Go BIZZY’)가 기다렸다는 듯 턴테이블을 ‘지지지직’ 돌리며(스크래칭) 음악을 틀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관중 200여 명이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뉴욕 필하모닉, 뉴욕 시립 발레단,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줄리아드 학교 등 이름난 예술 단체가 상주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종합 예술 공간인 링컨센터는 이날 한낮부터 힙합 공연장으로 변했다. 평소엔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클래식 팬들이 이 일대의 주축이지만 이날만큼은 젊음과 반항적 느낌으로 충만한 힙합 팬들이 링컨센터의 주인공이었다. 이날 야외 파티는 이달 들어 뉴욕 곳곳에서 열리는 ‘힙합 50주년’ 행사 중 하나다.
힙합의 유래나 ‘첫 힙합곡’ 등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많은 힙합 팬은 1973년 8월 11일을 ‘힙합의 생일’로 삼아 기념하고 있다. 당시 18세이던 자메이카 출신 디제이(DJ) 쿨허크(Kool Herc)는 뉴욕 브롱크스의 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친구들과 작은 파티를 열었다. 당시 턴테이블 두 개를 돌리는 특이한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런 방식으로 선보이는 음악이 힙합으로 발전했다고 힙합 팬들은 보고 있다. 68세인 쿨 허크는 지금도 ‘힙합의 아버지’로 통한다.
힙합의 ‘생일’에 대한 모호한 정의(定義)에 뉴요커들과 힙합 팬들은 개의치 않는다. 자유롭고 저항적이며 틀을 깬다는 힙합의 정신에 걸맞게 ‘아무려면 어떠냐. 우리는 즐긴다’는 분위기다. 뉴욕 곳곳에선 힙합 50주년을 축하하는 공연과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성의 전당’으로 자부하는 100년 전통의 뉴욕 공공 도서관까지 ‘힙합 비트’에 합류했다. 육중한 건물 전면에 힙합을 상징하는 그라피티(낙서) 디자인의 현수막을 내걸고 힙합 디자인의 한정판 도서관 카드를 배포하고 있다. 뉴욕 지하철표인 ‘메트로 카드’도 힙합 한정판 디자인이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12일 발행한 주말판 잡지 ‘NYT매거진’을 힙합 50주년 특별판으로 꾸미고 “힙합은 이미 세계를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다른 팝 장르와 달리 힙합 마니아들이 50주년을 의미 있게 축하하는 것은 힙합이 하나의 음악 장르를 넘어, 패션·문화·언어 등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퇴폐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힙합의 가사는 사회 저항적 내용을 담아 사회적 소수를 대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즈처럼 미국이 ‘발명’했고, 지극히 미국적인 스타일로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몇 안 되는 음악 장르 중 하나라는 것도 힙합의 특징이다.
힙합은 지난 50년 동안 세계 주요 도시의 거리 풍경을 바꿨다는 평가도 받는다. 힙합과 늘 동행하는 풍경이 건물 벽이나 담장 등을 캔버스처럼 이용해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는 낙서 ‘그라피티’다. 힙합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자유·일탈·저항 등을 그림으로 구현한 그라피티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철없는 청소년들의 범죄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후 하나의 예술 장르로 정착해 ‘그라피티 아티스트(예술가)’라는 전문 직업까지 생겨났다. 영국의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는 현존하는 가장 비싼 작가 중 하나다. 2021년 그림이 경매에서 약 300억원에 낙찰됐다.
힙합은 패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이른바 ‘X 싼 바지’라고 불리는 ‘배기팬츠(baggy pants·헐렁한 바지)는 10대 청소년들이 힙합이 시작된 브롱크스 거리를 쓸고 다니다시피 하며 입기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아예 힙합 바지라고도 불린다. 듀스·드렁큰타이거·지누션·원타임 등의 힙합 가수가 1990년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자 청소년뿐만 아니라 20·30대 남녀가 이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었다. 힙합 패션은 한국에서 풍요롭던 1990년대의 ‘X세대 문화’를 상징하는 패션 중 하나로 여겨진다.
문화 기획자 단테 로스는 워싱턴포스트에 “힙합은 많은 색상·크기·형태의 조각으로 이뤄진 모자이크로 역사상 최고의 예술 형태 중 하나”라며 “길거리 옷차림이나 길거리 예술 등 많은 대중문화가 힙합에서 나와 힙합으로 모인다”고 했다.
NYT는 “힙합이 대중의 생각과 언어도 바꿔놓았다”고 했다. 최근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를 부정적으로 지목하는 단어로 쓰이는 ‘워크(woke·깨어 있는)’의 ‘원조’도 사실 힙합이었다. 에리카 바두(52)의 ‘마스터 티처(2008)’ 등 유명 힙합 가수의 가사에 ‘워크’란 단어가 자주 나와 유행했다. ‘깨어서 저항하자’란 뜻에 가까웠지만 이후 단어가 정치화하면서 과도한 PC주의를 비아냥거리는 뉘앙스로 변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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