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임의 초록목록] 무더위와 함께 피었다가 더운 기운 가실 때 지는 바람꽃
바람꽃 북쪽으로 내모는 지금의 기후
재난 피해 거처하는 그 땅에서 무사하길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여러 날 계속해서 정말 덥다. 한낮에는 바깥 활동 자체가 어려울 정도다. 폭우와 폭염이 시소를 탄다. 우리 행성이 잔뜩 화가 났거나 어디 크게 고장이 난 게 틀림없다.
바람꽃을 조사하러 설악산과 점봉산에 오를 짐을 꾸리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온다. 바람꽃은 1,300m 이상의 고산에 사는 희귀 식물이다. 이 더운 날에 산엘 가냐며 엄마의 목소리는 걱정이 가득하다. 막상 산에 가면 나무 그늘이 많아서 덜 덥다고 명랑한 목소리로 답을 한다. 그래도 염려를 하시는 것 같아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선선해지니 피서에 제격이에요. 정말이다. 해발고도가 100m 높아지면 기온은 크게 0.7도 정도 낮아진다. 산악기상 정보를 보면 1,000m가 넘는 산들의 최고 기온은 우리 생활 권역보다 10도 이상 낮다. 소나기를 만나면 체감온도는 더욱 떨어진다. 비옷뿐만 아니라 체온을 유지해 주는 도톰한 겉옷을 꼭 챙겨 배낭을 여민다. 극한 불볕더위가 없을 뿐이지 산정에서 기후변화의 영향은 더 큰 편이다.
바람꽃은 한여름에 꽃이 핀다. 너도바람꽃과 나도바람꽃을 시작으로 홀아비바람꽃, 들바람꽃, 꿩의바람꽃 등 접두어를 단 여러 종류의 바람꽃 식물들 대부분이 봄에 피고 진다. 이들을 한데 묶어 바람꽃이라고 부르기도 하므로 헷갈릴 수 있다. 하지만 접두어를 달지 않은 진짜 ‘바람꽃’은 초복 무렵 피기 시작해서 말복 즈음 진다. 봄에 피는 무리들에 비해 훨씬 더 희귀한 식물이다. 남한에서는 설악산과 점봉산 정상 부근에만 산다.
바람꽃은 시베리아와 동아시아 고산지역을 대표하는 식물이다. 적설량이 많고 잔설이 오래 머무는 곳에서 군락을 이룬다. 신생대 후기 속씨식물이 번성한 이후로 지구는 기후변화를 반복적으로 겪었다. 한랭기와 온난기를 통과하며 바람꽃은 전보다 더 추운 어느 시기에는 러시아 연해주의 시호테알린산맥을 타고 백두대간 하부의 깊은 곳까지 영역을 넓혔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다시 북쪽으로 물러났을 것이다. 과거에는 그들이 살 수 있는 땅이 더 넓었을 테지만 지금 한반도에서는 설악산과 점봉산이 전부다. 바람꽃처럼 특정 지역에서만 살아남은 식물을 두고 식물학자들은 ‘잔존종’이라고 부른다. 그들을 살린 땅을 ‘피난처’라고 한다.
설악산과 점봉산을 피난처로 딛고 선 바람꽃이 말한다. 지금의 기후가 그들을 자꾸만 더 북쪽으로 내몰고 있다고. 유럽연합(EU)은 기후변화 관측 데이터에 근거하여 지난달 기온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며 이는 화석연료 사용 이전 대비 1.5~1.6도 오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고산지역의 연평균 기온은 더 빠르게 오르는 게 문제다. 20세기를 전후하여 북반구 고위도보다 두 배나 높은 상승률을 보였고, 적설 면적은 21세기 말까지 최대 25% 감소할 수 있다는 우려를 몇 해 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발표했다.
식물학자들은 더욱 심각하게 걱정한다. 백두대간의 고산을 피난처로 살아남은 식물들을 얼마간 지켜보니 산정의 기온이 0.6도 상승하면 그곳 식물의 분포가 축소되기 시작하고, 1.2도 오르면 많게는 80% 이상 분포지 자체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기후변화는 단순히 온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눈이 적게 오거나 쌓인 눈이 너무 빨리 녹게도 한다. 쌓인 눈이 서서히 녹으면 늦은 봄까지 충분한 수분 공급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바람꽃은 수분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줄어든다는 모니터링 결과가 있다. 바람꽃이 사라지면 이들에 기대어 살아가는 곤충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을 것이고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더 커질 것이다.
무엇보다 불법 채취가 바람꽃을 이 땅에서 밀어내는 데 한몫하고 있다. 꽃이 예쁘고 귀하다며 뿌리째 캐서 배낭에 숨겨 가는 사람들이 있다. 뽑혀 나간 자리가 여기라고, 점봉산산림생태관리센터 직원이 짚어 준다. 십여 년째 수시로 이곳을 살핀다는 그분의 판단으로는 단시간에 군락지 규모가 절반이 넘게 줄어든 가장 큰 원인은 사람의 남획 때문일 거라고 한다. 내 살점이 파인 것처럼 순간 너무 아팠다.
소낙비가 한바탕 퍼붓는다. 외투와 우의를 서둘러 꺼내 입는다. 금세 한기를 느껴 오들대는데 내 앞의 바람꽃은 지금 이 온도 참 좋다는 듯이 전보다 더 한들거린다. 재난을 피하여 거처하는 그 땅에서 바람꽃이 부디 오래 무사했으면 좋겠다. 등대시호와 금마타리와 뒤섞여 아름답게 피어 있는 바람꽃이 내게 말한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먼 과거부터 극한 환경에도 함께 살아남은 백두대간 등성이의 강인한 식물들이 아직은 곁에 있으니 조금 마음을 놓으세요.
허태임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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