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기림의 날, 그리고 ‘시간의 정치학’

오광수 기자 2023. 8. 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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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은 ‘위안부’ 기림의 날…우리 사회 ‘메타 기억’ 함의
2023 기림의 말 프로젝트, ‘기억의 풍경’에 파동 기대

2018년 개봉된 영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관부(關釜) 재판’이 영화의 소재다. ‘정동’을 일깨우는 명대사도 여럿이다.

“일본 놈들이 우리한테 사과를 할까. 그놈들이 이 배정길이 앞에서 무릎을 꿇을 거냐고!” 극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정길(김해숙 분)은 일갈한다. “나를 내 본래 모습으로 돌려줘. 당장 17살 때 그때 모습으로 돌려줘!” 배정길은 울부짖는다. “일본을 통째로 준다 해도 난 싫어! 잘못했다,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 사과해!” 배정길이 원하는 것은 진정한 사죄다.

재판을 주도하는 문정숙(김희애 분)은 함께하는 이들을 다독인다. “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겠죠.” 결과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이제 ‘역사적 피해자’, ‘공적인 피해자’다.

‘시모노세키 재판’으로도 불리는 ‘관부 재판’의 출발지는 ‘근대의 통로’이던 부산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에 의해 처음 공공의 장으로 나왔다. 이를 계기로 부산에 ‘정신대 신고전화’가 개설됐다. 이 과정에서 모인 피해 여성들이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 고소장을 내면서 재판의 막이 올랐다. 재판의 정식 명칭은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 1998년 4월 1심 선고까지 7년간 21차례 공판이 진행됐다. 그 결과는 최초의 일부 승소 판결이었다. 1심 재판부는 일본 정부가 원고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에 각각 30만 엔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의 청구 소송도 기각됐다. 물론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가 기각 결정으로 1심 판결을 뒤집었지만, 관부재판은 역사에 ‘기록’을 남겼다.

박현선 서강대 교수는 영화 ‘허스토리’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의 재연이 아니라 네 명의 여성이 보여주는 각기 다른 ‘포스트식민 상흔의 흔적들’에 있다”고 주장한다(‘일본군 ‘위안부’의 영화적 기억과 크로노폴리틱스’ 논문 참조). 그는 “모성 멜로드라마 내에서의 의미심장한 변형은 분명 가족의 틀뿐만 아니라 법 민족 국가의 규범과 틀까지 뒤흔들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허스토리’ 속 증언은 국가와 민족,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어 ‘트랜스내셔널한 기억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는 한국 사회 내부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는 크로노폴리틱스(chronopolitics), 즉 ‘시간의 정치학’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캐롤 글럭 콜롬비아대 교수가 말하듯 ‘시간의 정치학’은 “국제적, 국내적 정치를 변화시키고 시간을 거슬러 기억의 풍경에 변화를 가져오는 조건을” 만든다.

‘시간의 정치학’ 속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다룬 한국 법원의 상반된 판결을 호출한다. ‘같은 피해, 정반대 판결’이다. 피해자 등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이다. 하나는 원고 전면 승소, 다른 하나는 각하였다.

서울중앙지법 제34민사부는 2021년 1월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12명이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1인당 1억 원씩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원고 전면 승소 판결을 했다. 같은 해 4월 21일 서울중앙지법 제15민사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20명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요건을 갖추지 못해 부적법하다며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했다. 둘 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이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합의’(‘2015 합의’)와 관련 있다. 전자는 ‘2015 합의’ 직후인 2015년 12월 30일 정식 소송절차로 이관된 사건에 대한 판결이다. 후자는 ‘2015 합의’ 1주년에 맞춰 2016년 12월 28일 추가로 제기된 소송에 대한 판결이다. 재판부의 판단 잣대를 일일이 따지진 않겠다. 다만, 헌법재판소는 ‘2015 합의’의 성격, 적용 대상에 관해서는 2019년 12월 27일 결정에서 “정치적 합의”에 불과하며 “이 사건 합의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리가 처분되었다거나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적 보호권한이 소멸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럼에도 ‘2015 합의’를 보는 한국 법원의 판단은 이처럼 달랐다.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역사적인 날이다. 2017년에는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는 ‘2023 기림의 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관련 책자 발간과 북토크 개최를 준비 중이다. 이와 함께 ‘기림의 말 공모전’도 이달 말까지 진행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라는 역사적 ‘기억’에 관한 또 다른 ‘시간의 정치학’이 되었으면 한다.

오광수 편집국 부국장, 걷고싶은부산·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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